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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의 국경사무소. 여권을 검사할 때마다 일로나는 나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본다. 많은 나라에 비자 없이 방문할 수 있고, 그 때문인지 도장도 금방 받기 때문이다. 나름 뿌듯한 마음으로 여권을 내민다. 출입국관리사무소 직원이 내 여권을 보자마자 저쪽 어디 가서 무슨 도장을 받아 오라며 돌려보낸다. 뭐지? 어디로 가라는 거야? 내가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한 아저씨가 다가와 한쪽 구석에 있는 창구를 가리킨다. 창구로 가서 여권을 내민다. 직원 하나가 체온을 잰 후 도장 하나를 찍어준다. 그리고 검사비 10바트(약 330원). 메르스 문제로 우리나라 사람만 골라내 이런 검사를 요구하고 있다. 정말 뭣 같은 게 여럿 고생시킨다. 감기 기운이 있는 일로나는 다행히 한국인이 아닌 관계로 무사통과.

비엔티안에서 출발한 버스는 우돈타니에서 멈추고, 그곳에서 다시 방콕행 버스를 탄다. 태국의 장거리 버스는 정말 좋다. 라오스는 말할 것도 없고, 우리나라 고속버스보다도 좋다. 넓은 좌석에 담요, 빵, 물, 음료 그리고 팟타이까지. 뭐니 뭐니 해도 지금 제일 좋은 건 시속 100km로 달릴 수 있는 잘 닦인 도로다. 그 도로를 달리고 달려 저녁에 방콕에 도착한다.

연락했던 카우치서핑 친구 껑은 다른 곳에 일이 있어 그의 조카인 킹이 우릴 데리러 온다. 유쾌하고 재미있는 친구다. 킹이 대접해주는 맛 난 저녁을 먹은 후 맥주를 사 들고 그의 집으로 간다. 

테라스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노닥노닥. 킹이 어렸을 때 가수로 활동했던 유튜브 동영상을 보며 한바탕 웃는다. 겸사겸사 CD도 선물 받는다. 그 사이 껑이 온다.

껑을 따라 그의 아파트로 가니, 미리 온 카우치서핑 친구 셋이 있다. 라트비아에서 온 자전거 여행자들이다. 감기에 생리통까지 겹친 일로나는 한쪽에서 쉬고, 난 친구들과 맥주를 마신다. 우뚝 솟은 높은 아파트 발코니에서 바라보는 방콕의 야경이 멋지다. 

껑이 옆집도 비어있다며 불편하면 옆집에서 지내도 된다고 하는데, 인터넷이 안된다고 해서 그냥 라트비아 친구들과 같이 머물기로 한다. 영어가 살짝 부족한 껑은 흔히 만나기 어려운 친절함의 소유자다. 즐거운 방콕 여행이 될 것 같다.

껑이 내준 아파트는 껑의 임시 숙소 같은 곳이어서 집에 아무것도 없다. 대신 킹이 가까운 곳에 살아 라트비아 친구들과 함께 킹네 집에 가서 아침을 먹는다. 태국은 원래 집에서 조리를 잘 안 하고, 반찬을 사와 먹는 편이기 때문에 집밥이라고 해서 별 특별하진 않다. 껑은 킹에서 돈을 찔러주며 점심도 챙겨주라 하고는 서둘러 일하러 간다. 킹이 점심으로 먹으라고 사준 음식들을 들고 아파트로 돌아온다.

이 아파트엔 멋진 수영장이 있다. 더운 날 돌아다니기도 귀찮은데 잘됐다 싶어 옷을 갈아입고 수영장에 들어간다. 수영장이 있는 집은 나의 큰 로망 중 하나다. 종일 수영장에 들락날락하며 하루를 보낸다.

일을 마치고 돌아온 껑은 또 맥주를 사 들고 왔다. 불교 신자인 껑은 스스로 삼 개월 동안 금주를 하면서도 우리를 챙겨주는 건 잊지 않는다. 가끔 우리의 영어를 이해 못 하거나, 지금 우리가 다른 일행과 같이 머무는 상황, 그밖에 작은 일 하나하나 뭘 그렇게 미안하다고 하는지 내가 다 미안할 정도다. 평수는 작지만 고급 아파트 두 채에다 자기가 사는 집, 방콕에서 200km 떨어진 동부 해안 한적한 곳에 또 다른 별장을 갖고 있는 껑은 빈집이 많으니 언제든 와서 지내라고 한다. 꽤 잘 사는 친군데, 흔히 그런 사람들에게서 풍겨나오는 일말의 거들거림이 코딱지만큼도 없다. 오히려 자세를 한껏 낮춘 그의 친절이 너무 심해서 여행객이 많이 찾는 방콕에서 과연 이런 식으로 카우치서핑을 즐길 수 있을까 싶은 걱정이 들 정도다. 어제 라트비아 친구들을 데리고 아유타야에 갔다 왔다는데, 내일 아유타야에 가려고 하는 우리를 또 데려다주겠다는 걸 간신히 말린다. 에어컨 잘 나오는 좋은 차를 타고 편하게 갔다 오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으나 같이 가면 또 밥 챙겨주려 할 테고, 그 먼 거리를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하게 만들기에 껑은 너무 순진하다. 라오스의 장사치들에게 질려버린 인간에 대한 믿음을 껑이 되찾아 준다. 좋은 친구를 만나는 건 언제나 행복한 일이다.

코감기에 목감기에 생리통까지… 일로나의 컨디션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오뉴월 감기가 그렇게 독하다더니 우리나라 여름은 상대도 안 되는 날씨에 걸린 감기가 쉽게 가시질 않는다. 오늘 가기로 한 아유타야 관광을 접고 그냥 집에 쉬기로 한다. 사실 수영장 때문에 어디 돌아다니기가 싫다. 몸을 축 늘어뜨리고 있는 일로나도 수영장에만 들어가면 얼굴이 피어오른다.

저녁에 다시 껑과 함께 킹네 집으로 가서 저녁을 먹는다. 오늘은 킹의 아빠이자 껑의 형인 루이 아저씨도 있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마리화나 얘기가 나왔는데, 루이 아저씨가 그 유통 경로를 좀 아는 모양새다. 가만 보니 아저씨에게서 태국이나 홍콩 영화에 등장하는, 하와이안 꽃 남방을 걸치고 다니는 조폭 두목의 풍모가 느껴진다. 아저씨가 손사래를 치며 급 화제를 돌린다.

재미있게 얘기를 나누고 껑과 함께 ‘씨암 집시 정션’이라는 야시장에 간다. 

고가도로 아래 길게 늘어선 중고물품을 파는 시장이다. 황학동 도깨비 시장 분위기와 비슷하다. 물건은 더 세련되고 다양하다. 전체적인 분위기가 마음에 든다. 멋스러운 빈티지 물건들 사이에 먹거리 장터가 있고, 간간이 있는 펍에선 흥겨운 라이브 음악이 퍼져 나온다. 여행자들이 전혀 없는 곳이라 메뉴에 영어는 없다. 새로운 보물을 발견한 느낌. 지지리도 분주한 카오산 로드가 지겹다면 이곳이 그 대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곳의 분위기도 분위기지만, 자신의 개성을 거리낌 없이 표현하는 타이 사람들의 모습도 이곳과 잘 어울린다.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사회도 그 모습을 잘 포용하는듯하다. 수염에 문신에 옷차림 등을 보면 우리나라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스타일로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을 쉽게 볼 수 있다. 성 소수자에 대한 포용력은 말할 것도 없고… 굉장히 부러운 모습이다. 태국은 CF를 참 잘 만든다. 거대한 인프라가 뒷받침돼야 하는 영화는 아직이지만(그래도 우리나라엔 없는 최고 권위의 깐느 황금종려상 수상한 감독도 있다.),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필요한 CF가 잘 나오는 건 자유롭게 개성을 드러낼 수 있는 사회이기 때문에 가능한 게 아닐까?

야시장 한쪽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신다. 얘기를 나누다 알게 된 놀라운 사실 하나! 루이 아저씨가 진짜 마피아 보스 같다는 농담을 하는 중에 껑이 조심스레 실제로 그랬다는 얘기를 털어놓는다. 자기 아빠가 태국 남부 쪽 조직의 보스였다고… 자기는 어려서 잘 기억은 안 나는데 30년 전엔 집에 경찰이 찾아와 잘 봐달라고 고개를 조아렸을 정도라고 한다. 5형제의 막내인 껑과 큰 형의 나이가 20살 차이라고 하니 껑은 자세한 건 잘 모르는 눈치다. 어찌 됐건 이 엄청난 순둥이에게서 나온 말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다.

야시장 구경을 마치고, 수영장이 있던 그 아파트가 아니라 방콕 외곽 주택 단지에 있는 껑네 집에 간다. 집 앞에 차를 세우고는 여기가 우리 집인데 지금 화장실에 문제가 있으니 근처 다른 아파트에서 자라 한다. 그리고 아침에 이쪽으로 밥 먹으러 오라고… 

“아파트가 또 있어? 너 도대체 집이 몇 개야.” 

껑은 너무나 건조하게, 아무런 감정 없이 정말 물어본 질문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듯이 손으로 주변을 가리키며 말한다. 

“여기, 여기, 여기 쭉… 근처에 12채… 블라블라.”   

그리곤 주택단지 앞에 있는 레지던스 호텔 같은 곳에 방을 내주고 집에서 못 재워서 미안하단 말을 연발한다.

내가 쌓아온 어떤 이미지에 대한 정보들이, 그 편견이 산산조각 난다. 뚱뚱하고 (난 맘에 들지만)너덜너덜한 옷차림에 단정하고는 거리가 먼 모습과 항상 조심스럽게 뭔가에 주눅 들어 있는 겉모습과 달리 그는 한가닥 하던 조폭 두목의 막내아들이고, 집 십수 채를 가진 성공한 30대 사업가다. 그럼에도 잠시 머물다가는 여행자에게 정말 최선을 다해 대접해주는 친구. 껑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껑은 집으로 돌아가고 우린 깔끔한 방에 짐을 내려놓는다. 

“아니 저렇게 순진한 친구가 이 잔인한 세상에서 어떻게 사업을 하는 거지?”
“이렇게 사람들을 도와주니 사람들도 너도나도 껑을 도와주는 게 아닐까?” 

일로나의 의견이 맞다면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바가 아닌가? 그리고 태국은 이런 친구가 성공할 수 있는 사회인 건가? 태국이 그렇게 성숙한 시민 사회는 아닐 텐데… 이런 아이러니에 빠져있는 중에 일로나가 농담을 던진다.

“껑이랑 계약 안 하면 형들이 동원되는 걸지도 모르지.”

안락한 잠자리는 늦잠은 부른다. 그리고 그런 늦잠은 곧 행복이다. 게으르게 일어나 껑네 집으로 간다. 껑도 행복을 즐겼는지 늦은 아침을 먹고 있다. 우리도 자리에 앉는다. 

아침 식사 후 껑의 조카 와이와 함께 껑의 차를 타고, 루이 아저씨 집에 간다. 가방, 옷 등을 대량 주문받고 납품하는 일을 온 가족의 사업으로 하는 것 같다. 껑이 잠시 일을 보는 동안 루이 아저씨는 자신이 만든 엔터테인먼트 회사에서 제작한 음반을 자랑하느라 바쁘다. 알고 보니 아들 킹을 가수로 데뷔시킨 것도 루이 아저씨였다. 킹이 성공을 못 했는지 지금은 딸이 가수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한다. 난 어제 껑의 얘기 때문에 그 어둠의 세계와 엔터테인 세계의 상관관계를 생각해본다.

껑이 일을 마치고 와이와 함께 짜뚝짝 주말 시장에 간다. 10년 전 이곳에서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소매치기를 당했었다. 이곳은 그때처럼 여전히 분주하다. 

난 중국에서 잃어버린 모자를 사고, 일로나는 친구들에게 보낼 엽서를 산다. 그리고 껑의 친구들이 운영하는 문신, 캐리커쳐 그림 가게에 앉아 시간을 보낸다. 껑의 부탁으로 우리도 캐리커쳐 그림을 하나 얻는다. 

아트 스트리트 그룹이라 하는 친구들의 모습이 하나같이 비범하다. 저녁이 돼 손님이 줄어들자 한쪽에 드럼 세팅을 하더니 기타 치며 노래를 부른다. 누구 들으라고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지들끼리 즐기기 위해 시장 한편에서 드럼과 엠프를 켜고 기타 치고 노래 부르는 모습이 무척이나 즐거워 보인다. 우리도 덩달아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든다.

짜뚜짝 마켓에서 나와 그 유명한 카오산 로드로 간다. 12년 전 이곳에 처음 왔을 때는 딱 카오산 로드만 분주하고 주변이 슬슬 개발되고 있는 시점이었다. 지금 카오산 로드는 걸어 다니기가 힘들 정도로 사람이 미어터지고, 옆 블록 길까지 그 기세가 이어지고 있다. 

방콕이 처음인 일로나를 위해 카오산 로드를 쭉 가로지른 후 한쪽, 조금은 한적한 곳에 있는 노점 식당에서 꺼무양과 맥주를 마신다. 이곳의 꺼무양은 아주 일품이다. 

“여기 유명하다더니 너무 정신없어서 맘에 안 들어. 어제 갔던 시장이 더 좋아.” 

일로나의 말에 나도 크게 공감을 표한다.

오늘 계속 우리와 같이 움직이고 있는 껑의 조카 와이가 영어를 잘해 껑의 말을 통역해 주고 있다. 껑은 조카가 너무 공부만 해서 이런저런 경험을 하라고 여기저기 많이 데리고 다닌다고 한다. 똘망똘망 수줍음 많은 귀여운 꼬마다. 와이는 너무 어리고, 껑은 자체 금주 기간이라 우리만 맥주를 마시는 게 좀 아쉽다. 그래도 감기 때문에 한동안 고생하던 일로나가 오랜만에 맥주를 마시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다. 즐거운 술자리 중에 내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뒤로 돌아가 계산을 하려던 껑을 붙잡는다. 이 친구 너무 착하다. 좋은 현지 친구 하나 생기면 여행의 즐거움은 수십 배 커진다.

늦잠에서 일어나 껑네 집에 간다. 껑의 아내 씨미가 아침을 준비하고 있다. 태국은 아침부터 고기반찬이 많이 깔려 좋다. 껑은 우리의 아침 식사가 끝나고서야 졸린 눈을 비비며 나온다. 사업에, 늦게까지 우릴 대접하느라 피곤한가 보다. 껑과 좀 노닥거린 후 다시 숙소로 돌아와 짐을 싸고 떠날 준비를 한다. 껑의 차에 짐을 싣고 꼬사무이행 버스를 타러 간다. 약 3주 후 방콕에서 다시 만나길 약속하고 손을 흔들며 버스에 오른다.

태국의 장거리 버스는 참 좋다. 버스에 승무원이 있고, 먹을 것도 주고, 비행기처럼 좌석에 개인 모니터도 있어서 영화도 볼 수 있다. 

그리고 휴게소에서 먹을 수 있는 공짜 저녁 식사 티켓까지… 

그런 서비스 때문에 비싼 감은 있지만 그래도 우리나라와 비교하면 싼 가격이다. 그렇게 영화도 보고 밥도 먹고 스르륵 잠을 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