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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21. Jeju, Korea (2018. 5.6 ~ 5.8)

2018. 5. 21. 03:42 | Posted by inu1ina2

일로나를 만나고 세계 일주 계획을 접었을 때 언젠가는 베오그라드에서부터 다시 여행을 이어갔으면 하는 꿈이 있었다. 그때는 가족이 함께해야 하기 때문에 자전거는 안될 테니 캠핑카 여행을 하면 어떨까 생각했었다. 우연히 AJ렌터카에서 시행한 제주 캠핑카 체험단에 선정되어 미래의 꿈을 시험해 볼 기회를 얻었다. 2박 3일간의 짧은 일정이지만 캠핑카 여행을 맛보기엔 충분하다. 언제나 시작은 그런 작은 걸음에서 시작하는 법이니까.

그런데 항공권을 포함한 여행일정을 잡고 떠날 날만 기다리고 있던 때에 일로나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됐다. 의사 선생님 말로는 자궁에 피가 고여 있어 위험하니 절대 무리하지 말라 하여 여행을 취소할까도 생각했지만, 어차피 우리의 여행 계획이란 게 경치 좋은 장소 찾아 자리 펴고 늘어지는 것이어서 그냥 강행하기로 했다.

30분 지연된 비행기를 타고 제주공항에 도착했을 때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하필 계획한 2박 3일 일정 내내 비 예보가 있었다. 오히려 생각보다 빗줄기가 가늘어 다행스러운 마음이었다.

공항에서 연결된 셔틀버스를 타고 AJ렌터카 사무실로 가서 간단한 확인절차를 밟고 캠핑카를 인계받았다. 캠핑카가 흔히 알고 있는 내부에 모든 설비가 장착된 완성형 캠핑카가 아니라 스타렉스를 기본으로 한 캠핑카라 텐트를 쳐서 확장하는 형태여서 텐트 설치법이나 그 밖의 장비 등을 차근차근 설명받으려고 했지만 계속 비가 내리는 상황이어서 최소한의 주의사항만 듣고 재빨리 차에 올라탔다. 차 내부 여기저기에 QR코드가 있어 장비별로 동영상 가이드를 확인할 수 있다니 그걸로 해결하면 될 일이다.

우선 마트에 가서 제주의 명물 흑돼지 삼겹살과 그 밖의 식재료를 샀다. 캠핑카에 화로 세트가 있어서 고기를 직접 구워 먹기로 했었다. 제주 고깃집 가격이 만만치 않고, 캠핑을 왔으면 최대한 캠핑 분위기를 내는 게 당연지사.

애초엔 여유롭게 해안도로 드라이브를 하다 전망 좋은 곳에 자리를 잡으려 했으나 일로나가 임신 때문에 화장실에 자주 가야 해서 금능해수욕장에 마련된 야영장에 차를 세웠다. 

몸조심해야 하는 일로나를 앉혀두고, 천방지축 날뛰는 인후를 잡아 세우며 텐트를 치기 시작했다. 텐트는 동영상 가이드 확인할 필요 없이 단단히 칠 수 있는 구조였다. 그래도 부슬비 속에서 혼자 하려니 시간이 꽤 결렸다.

텐트를 다 치고 바로 저녁 바베큐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인후가 젖은 모래밭에 왔다 갔다 하며 옷을 더럽히고, 비 때문에 문을 열 수 없는 텐트 안에 자욱한 숯불 연기가 가득 차고…. 잘 구워진 삼겹살은 역시 맛있었으나 내 정신은 이미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피폐해진 상황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일로나를 앉혀두고 모든 정리를 도맡아 한 내가 대견했다. 

굉장히 짜증스러운 상황의 연속이었는데 해맑게 웃는 인후와 전혀 불편한 내색을 하지 않는 일로나 덕에 나도 곧 정신이 돌아왔다. 경험상 힘든 여행일수록 오랫동안 즐거운 추억으로 남는다. 아마 이번 여행도 꽤 오랫동안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내지 않을까 싶다.

환경이 바뀐 탓인지 전혀 자려고 하지 않는 인후를 간신히 재우자마자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사이드 어닝 윗부분에 물이 고여 밤새 몇 번을 일어나 물 밀어내기를 반복했다. 

아침에 비몽사몽 일어나니 잠시 비가 그쳐 후다닥 아침을 먹고 해변에서 뛰어놀았다. 오랜만에 바다를 보고 즐거워하는 인후를 보고 있자니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어느새 진짜 아빠가 된 거다. 

날이 좋았더라면, 둘이서 텐트를 후딱 접고 펼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좀 더 느긋하게 캠핑을 즐기고 싶은데, 비가 내리면 꼼짝없이 안에만 있어야 하고, 텐트가 쳐져 있는 상태에서는 차를 움직일 수 없는 시스템이어서 아쉽지만 이번 캠핑은 이것으로 끝내기로 했다. 무엇보다 일로나가 절대 안정이 필요한 때라 둘째 날은 호텔에서 묵기로 하고 텐트를 접었다. 

호텔 가는 길에 차로 갈 수 있는 오름이 있다 하여 갈까 싶었지만, 빗길에 위험할 것 같아 간단히 둘러볼 수 있는 성이시돌 목장에 잠시 들렀다. 

인후에게 말 구경 시켜주러 간 건데 정작 놈은 졸려 품에서 떠날 생각을 안 했다. 그러잖아도 딱히 볼 건 없었다. 

일로나 말마따나 해외여행을 오래 하면서 이것저것 본 게 많으니 국내 여행에선 딱히 흥미로운 볼거리 찾기가 쉽지 않다. 아이스크림 하나 먹고 다시 차에 올랐다. 

비와 짙은 안개를 뚫고 호텔로 가서 짐을 풀었다. 

제주에 왔으니 고기 국수 맛 한번 보겠다고 나서긴 했는데, 유명하다는 식당에 가서 몇십 분씩 기다릴 만한 열정은 없다. 고기 국수가 다 거기서 거기려니 싶어 호텔 근처에 있는 식당에 갔다. 대부분 7천 원 하는 국수를 5천 원에 팔길래 좋아했는데, 역시나 제주에서 손에 꼽힐 것이 분명한 맛대가리 없는 국수가 나왔다. 

언제나 생각하는 거지만 맛집보다는 맛없는 집 정보가 더 유용하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다시 호텔로 돌아와 다음날까지 포근한 침대에서 맘 편히 뒹굴며 여행을 마쳤다. 

이번 여행을 통해 계획하는 미래의 캠핑카 여행을 지금 배 속에 있는 둘째가 충분히 자란 후에 해야겠다는 결론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