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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해외여행이 작년 7월이었다. 결혼한 후 최소한 일 년에 두 번은 짧게라도 해외여행을 가자 했었다. 우린 가난하지만, 남들이 더 나은 생황을 위해 쓰는 돈을 우리는 더 많은 여행을 위해 쓰기로 했다. 그런데 일로나의 유산과 인후의 골절상으로 잡아놨던 비행기 티켓까지 취소해야 했던 상황들 때문에 14개월이 지나서야 다시 여행을 가게 됐다. 일로나가 배가 많이 불러서 올해 여행은 끝났구나 싶었는데 태국 관광청 이벤트에 당첨돼 방콕행 비행기 티켓이 굴러들어와서 갑자기 여행이 진행됐다. 곧 추석이고, 추석이 지나면 일로나는 여행하기 힘든 상태에 접어들기 때문에 추석 전에 짧게 일주일만 갔다 오기로 했다. 해변을 가고 싶지만 짧은 여행 기간을 이동 시간으로 잡아먹긴 싫고, 방콕도 딱히 땡기지 않아서 방콕에서 가까운 그리고 아직 가보지 않은 아유타야를 목적지로 정했다. 보통 당일치기나 1박 코스로 다녀오는 여행지인 곳이라 오래 머물만한 장소는 아닌 듯하지만 아이 데리고, 임신 중인 아내와 여기저기 돌아다닐 일도 없으니 괜찮은 숙소에서 늘어질 생각이다. 그런 여행이라면 오래된 도시가 좋다. 어쨌든 그리하여 비행기를 타고 방콕으로 향했다.

3년 전 카우치서핑으로 만났던 껑이 직접 공항에 마중 나와 우리를 아유타야 숙소까지 데려다준다. 그때도 많이 언급했지만 참 좋은 친구다

오늘은 바빠서 그냥 가고 금요일에 다시 오겠다 하고는 서둘러 떠나고 우린 짐을 푼다.

혼자나 둘이 여행할 때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느라 숙소에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아서 숙소에 큰 비용을 투자하지 않았다. 기본적인 것만 갖춘 잠자리면 족했고, 숙소에 투자하는 과도한 비용은 여행 경비를 급상승시켜 여행 자체를 망설이게 하는 요인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아이와 함께하다 보니 숙소에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게 됐다. 특히 이번엔 바닷가도 못 가는 짧은 여행이라 수영장이 딸린 괜찮은 숙소를 찾았다. 그래서 지금껏 상상해보지도 않았던 1박에 8만 원이나 하는 호텔을 잡았다

예약한 방은 호텔에서 제일 저렴한 방이었는데 비수기라 손님이 없는지 묻지도 않았는데 훨씬 좋은 풀사이드룸으로 업그레이드해줬다. 이 호텔을 선택한 이유가 수영장이었던 걸 고려하면 작은 횡재다.

호텔은 아주 맘에 든다

내가 내 돈 내고 묶었던 그 어느 호텔보다 좋다. 동남아 여행에서 20~30만 원 하는 호텔에 묵는 사람에게는 평범하겠지만 내게는 열라 럭셔리한 숙소다. 수영장 크기나 분위기도 좋다. 한가지 짜증 나는 건 강을 사이에 두고 호텔 건너편에 있는 스투파들에 비친 조명이 꽤 멋진 야경을 만든다고 들었는데 제일 큰 스투파가 공사 중이라 녹색 장막으로 둘러쳐져 있어 경관이 기대한 바에 미치지 못하다는 거다. 왜 하필 지금 공사를 하는 것인지...

짐을 풀고 배가 고파 호텔 바로 앞에 있는 길거리 식당에서 쌀국수를 시킨다

인후는 뭐가 맘에 안 드는지 내내 심통을 부려 일로나가 서둘러 먹고 인후를 데리고 들어가고 나 혼자 남아 남은 국수를 먹는다. 호텔 바로 앞이라 좋은데 그리 맛이 좋진 않다. 다시 올 일은 없겠다.

호텔로 돌아와 바로 수영장에 뛰어들었다. 종일 심통이 나 있던 인후는 그제야 웃음꽃을 띄우며 물장구를 친다. 날이 흐리더니 갑자기 천둥 번개와 함께 비가 내린다. 일로나는 무섭다며 들어가고 나와 인후만 한참을 더 비 오는 수영장에서 논다

몸에 뭐 걸치는 걸 싫어해서 씌우거나 입는 각종 물놀이용품을 거부하던 인후도 이번에 산 튜브는 마음에 들어 해서 처음으로 애에게서 손을 놓고 물놀이는 할 수 있었다. 이게 얼마나 큰 자유인지 애 없는 사람은 모른다. 그나저나 이제 세 살인 놈이 벌써 미운 네 살 중급이상 단계에 접어든 것 같아 골치가 아프다.

전혀 이곳 시차를 고려하지 않는 인후 때문에 우리도 덩달아 새벽같이 일어난다. 항상 시간이 끝날 때쯤 가던 조식을 시작도 하기 전에 가서 식탁에 앉아 기다린다. 인후가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포크와 숟가락을 식탁에 두드리며 이유를 알 수 없는 심술을 부려 혼을 냈더니 울음을 터뜨린다. 요즘 왜 이러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지도 무슨 이유가 있어서 그럴 텐데 그 속을 알 수가 없으니 원...

서둘러 밥을 먹고 놈이 그렇게 원하는 수영장으로 간다. 역시나 웃음꽃 만발.

어제부터 다른 숙박객은 보이지 않고 수영장은 항상 우리 차지다. 그것도 방 옆이라 참 좋다. 이래서들 비싼 호텔에 묵나 싶다.

한참 물놀이를 하고 방으로 들어온다. 애 낮잠을 재우고 나 혼자 환전하러 나간다. 무료로 대여해주는 호텔 자전거를 타고 근처 은행에 간다. 아유타야엔 사설 환전소가 보이지 않아 그냥 은행에서 환전한다.

혼자 나온 김에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짧게 한 바퀴 돌아본다

아유타야가 제법 오랫동안 유지된 왕국이었는데 현재는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스투파 말고는 뭐 볼 게 없다

도시 자체도 발전하지 못한 것 같고... 옛 느낌이 남아있는 골목들이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대로에서 한 블록만 들어가면 그냥 평범한 태국 동네 모습이다

이 큰 유적지 군을 잘 조성하면 괜찮은 그림이 나올 수도 있을 거 같은데, 그냥 좀 아쉽다.

인후가 낮잠을 자고 일어나 근처 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는다

평범한 쌀국수. 태국 로컬 식당의 음식은 참 저렴해 좋았다가 양이 너무 적어 또 시켜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메뉴에 처음 보는 파파야 튀김이 있길래 한번 먹어본다. 파파야를 채 썰어 튀긴 요린데 맛이 좋다

파파야가 아니라 그냥 튀김이라서 맛있다. 뭐든 튀기면 맛이 좋으니까.

호텔로 돌아와서 다시 수영장으로... 잠시 나갔다 들어와서 수영장. 밥 먹고 와서 수영장. 이런 패턴으로 계속 지낼 것 같다.

점심을 먹은 식당이 썩 맘에 들지 않아서 좀 비싸 보이는 옆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는다. 음식은 역시 평범한 타이 음식

가격만 더 비쌀 뿐이다. 강변이라 분위기는 좋아 시원한 맥주 한잔 마시면 딱 좋겠지만 일로나는 임신 중이고 난 점점 만성통풍이 되어가고 있어서 맥주는 포기한다. ~ 맥주도 맘껏 못 마시는 인생이라니...

다시 돌아와서 수영장행. 아이와 여행을 다닐 때면 아이에게 경험을 준다는 핑계를 대긴 하지만 사실 아이가 여행을 즐기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나의 즐거움에 귀찮은 동행을 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니 이렇게 웃으며 물놀이 하는 아이를 보면 그런 미안함에서 잠시나마 해방될 수 있어 좋다.

유적지 탐방에 나서 본다그래도 아유타야까지 왔는데 호텔 수영장에서만 놀 수는 없다. 계속 그러기도 지겹고... 보통 이곳 여행객은 툭툭을 대절해 종일 유적지를 둘러보지만, 우리에겐 힘든 일이다. 그래서 오전 중에 하나만 둘러보고 올 예정이다.

여러 유적지 중 아유타야의 상징처럼 돼 있는 나무에 박힌 부처두상이 있는 왓마하탓에 간다. 계속 한국 시차를 따르고 있는 탓에 이곳에선 이른 시각에 움직였더니 사람들이 없어 둘러보기 좋다.

어젯밤 내내 비가 내려서 걱정했는데 비는 그치고 흐릿한 하늘이 오히려 따가운 햇볕을 가려줘 다행이다.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유적지에나 감흥을 받는 나는 아유타야에 큰 기대를 하고 있지 않아서 그냥저냥 둘러보기 나쁘지 않다는 느낌이다. 뜨겁지 않은 날씨와 한적함이 큰 도움이 됐다.

애초에 훼손이 많이 된 유적지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또 시멘트로 덕지덕지 복구한 흔적이 많아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전체적으로 비슷한 느낌의 건물이 많다. 과거 버마와의 전쟁 중에 훼손됐다는 목과 사지가 없는 불상이 여기저기 많다

그 의미를 모르는 바는 아니나 버마군은 왜 그리 힘들게 돌덩이를 자르려고 했는지... 

완벽한 무신론자인 나는 종교에 엄청난 의미를 부여하며 몸과 마음, 재물까지 소비하는 사람들의 믿음을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다.

왓마하탓만 보려고 했는데 바로 옆에 다른 유적군이 있어 또 티켓을 사고 들어간다

지난여름 베트남에서 본 미선 유적지 양식과 비슷한 벽돌을 이용한 건축물 사이에서 다른 양식의 높은 건물이 하나 있다

앙코르와트 느낌이 좀 나기도 하고, 인도에서 본 어떤 유적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미선 유적지도 앙코르와트도 인도도 모두 힌두의 영향 아래 세워진 건축물들인데 완전 불교 왕족이었던 아유타야 유적지에서 그런 느낌을 받는다는 게 좀 흥미롭다.

날이 흐려도 습기 가득한 날씨라 땀이 주르륵주르륵

인후는 별로 흥미가 없는지 어느새 잠이 들었다

딱 여기까지

숙소로 돌아간다.

숙소 근처에 또 다른 길거리 식당에 간다. 보통 한 식당을 정하고 계속 그곳을 찾는 타입인데 입에 맞는 식당을 못 찾았다. 어제 숙소 직원이 숙소 옆 대로변에 있는 허름한 식당에서 밥 먹는 걸 봤다. 결과적으로 가장 허름하지만 제일 맛이 좋다. 좋아하는 쌀국수를 안 판다는 게 흠이지만 이제 점심은 이곳으로 정했다.

여느 때와 같이 다시 수영장으로 간다. 아유타야가 짧게 둘러보고 가는 여행지라 그런지 수영장에서 노는 사람이 없다. 맨날 우리만 논다. 그렇게 또 놀다 저녁을 먹고 또 수영하다 들어와 잠을 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