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Plan Korea
Columbia
Scott

일어나 아래층에 내려가니 마야의 미모와 이모부가 아침을 준비하고 있다. 간단히 인사를 하고 아침이 준비되는 동안 뒤뜰에 앉아 담배 한대 피며 커피를 마신다. 마야의 이모부가 자전거 광이라 이것 저것 묻는다. 이미 마야를 통해 나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를 알고 있다. 지도를 꺼내와 같이 얘기를 나누는 동안 마야와 이보, 페트코가 와서 다같이 식탁에 앉는다. 빵과, 치즈, 샐러드, 햄.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서양식 아침이다. 차이는 음식의 맛과 질이다. 햄과 빵이 맛있어서 많이 먹는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무며 오랜 시간 아침을 먹는다.

밥을 먹고 우리는 또 빈 투어를 위해 나온다. 어제보다 좀 더 더운 것 같다. 트램을 타고 시내 중심가로 와서 일로나와 나의 계획인 ‘Before Sunrise’ 투어를 시작한다. 다른 친구들도 딱히 다른 계획이 없고 중심가가 다 거기서 거기라 같이 돌아다니면서 중간 중간 유명하다는 곳도 다니며 같이 둘러본다. C 2-2C 2-3큰 도시는 아니지만 더위 속에서 곳곳에 퍼져있는 영화 속 장면을 찾아 다니는 게 그리 쉽지만은 않다. 마야의 길 안내가 아니었으면 좀 헤맬 뻔 했다. 아닌 게 아니라 방향을 잡지 못해 좀 헤맬 때면 다른 친구들은 우리의 계획 때문에 괜한 발걸음을 하며 헤매야 해서 같이 다니는 게 좀 부담스럽다. 일로나 또한 친구처럼 지내기는 하지만 직장 상사를 그렇게 끌고 다니는 게 좀 불편한 것 같다. 그래서 약속 장소와 시간을 잡고 각자 둘러보자고 하니 괜찮다고 해서 계속 그렇게 다녔다. 딱히 특별한 곳이 아니라도 도시 구석 구석 골목길이 좋아서 목적 없이 거닐어도 재미를 느낄 수 있다. C 2-6C 2-5C 2-7C 2-8C 2-9그래도 더운 날씨에 돌아다니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다뉴브 강변에서 잠시 쉰다. C 2-11C 2-4C 2-10어찌됐던 마냥 즐거운 과정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뭔가를 만들어 놓으면 나중에 오래도록 흐뭇한 추억이 될 거다.

대충 둘러보길 마치고 식당에서 맥주를 마시며 밥을 먹는다. C 2-29빈의 먹거리 물가는 전반적으로 우리나라의 1.5 ~ 2배 정도 하는 것 같다. 단위가 적어서 마음 놓고 있다간 금방 거덜나기 십상이다. 근데 음식의 양은 무지 많아서 식사량이 적은 여자라면 둘이서 하나를 시켜먹어도 될 법하다. C 2-30양까지 고려하면 1.2 ~ 1.5배의 물가 정도 되는 듯 하다. 우리나라에서 외식한지가 오래돼서 정확히는 모르겠다.

어쨌던 배불리 밥을 먹고 빈에 온 친구들의 목적인 레인보우 퍼레이드를 보러 간다. ‘레인보우 퍼레이드’라는 이름으로 많은 나라에서 성적 소수자의 축제를 하는 걸로 알고 있다. 잘은 모르겠는데 아마 이곳의 레인보우 퍼레이드가 꽤 유명할 거다. 길가에 앉아 기괴한 축제 복장을 한 사람들을 바라보며 사진을 찍어댄다. OLYMPUS DIGITAL CAMERAC 2-14OLYMPUS DIGITAL CAMERAC 2-15C 2-17C 2-21C 2-22C 2-23흥겨운 음악이 계속해서 흘러나와 축제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다. 세상엔 여러 가지 이름으로 다양한 축제가 있다. 직접 참여하는 축제가 아니라면 좀 실망스러운 경우가 많은데, 레인보우 퍼레이드는 볼거리도 있고, 남들 의식하지 않고 어디서나 흥겨운 음악에 몸을 흔들 수 있는 있는 사람이라면 꽤나 즐거울 수 있는 축제 같다.  C 2-19C 2-24C 2-18C 2-26C 2-16

정보를 찾아보니 자료마다 수치가 다 다른데 5~8%의 사람이 동성이나 양성의 성적취향을 갖는다고 한다. 일로나에게 말하니 일로나는 그 보다 더 많은 거라 한다. 주변에 그런 사람이 많은 것이다. 하기야 사회적 금기에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는 사람까지 포함하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C 2-27여행 중에 심심치 않게 게이 친구를 만났다. 이런 사람이 꽤 많구나 싶었다. 한국이라고 유독 이성애자만 많은 건 아닐 것이다. 그만큼 우리나라가 그들이 표면에 나오지 못하도록 억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지가 싫으면 자기만 안 그러면 그만이지 왜 그렇게들 남들이 어떤 취향을 갖던 그리 신경을 쓰는지 모를 일이다. C 2-25C 2-20

오래 동안 이어지는 퍼레이드는 어떤 성당인지, 궁전인지 멋있는 건물 앞에서 끝이 나고 그곳에서 콘서트가 시작된다. C 2-28오스트리아와 근처 나라의 밴드인 것 같은데 그다지 재미있진 않다. 유명한 노래를 부르면 모두들 호응하고, 자기들 노래 부르면 잠잠해져서 좀 안타까웠다. 그리 재미있지 않아서 우린 오늘의 일정을 마치고 마야의 집으로 다시 철수한다.

마야의 집에 도착해 유럽 컵 축구를 좀 보다가 발코니에서 커피 좀 마시면서 노닥거린다. C 2-31그렇게 휴식을 좀 취한 후에 일로나와 나는 우리의 잠자리로 가기 위해 나온다. 해가 지고 어두워지자 서늘하니 걷기가 좋다.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둘이서 멋있는 밤거리를 거니니 좋다. C 2-33

“둘만 있으니까 좋다.”
“어. 다음에 둘이서만 다시 오자.”
“오늘 너랑 오래 갈 것 같단 느낌을 받았어.”
“왜?”
“몰라. 그냥 그런 느낌이 들었어.”
“이 사람이 장난하나.. 오래가긴 뭘 오래 가. 끝까지 가야지…”

더위 속에서 힘들게 돌아다니는 와중에서도 짜증부리지 않고 웃음을 잃지 않았기 때문일 거다. 컨디션이 좋은 순간에 웃는 건 쉬운 일이다. 컨디션이 나쁠 때 웃을 수 있는 관계가 진짜 관계다. 사람은 그런 지점에서 신뢰를 쌓기도 하고, 반대로 잃기도 한다. 힘든 순간을 지켜보며 옥석을 가릴지어다.

마야의 집 근처에도 영화 속 장소가 있어서 찾아간다. 이름없는 골목길이라 꽤 헤맬 줄 알았는데 의외로 쉽게 찾았다. 마지막으로 설마 아직까지 있을까 싶었던 영화 속 레코드 가게를 찾았는데, LP가게가 CD가게로 바뀌었을 뿐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헌데 아쉽게도 늦은 시간이라 문이 닫혀서 영화 속과 같은 사진은 찍지 못했다. 그래도 온 기념으로 밖에서 한 컷 찍는다. C 2-32

집으로 가기 위해 트램을 탄다. 가만 보니 빈에는 버스가 없다. 대중 교통으로는 트램과 지하철만 있다. 그리고 차들이 좋은 건지, 기름이 좋은 건지 일반 차량도 매연을 거의 뿜지 않는다. 그래서 공기가 좋다. 빈은 참 살기 좋은 동네 같다.

즐거웠지만 힘든 하루였다. 영화를 쫓으며 사진을 찍는다는 것. 뭐 대수롭지 않은, 또는 유치한 놀이일 수도 있다. 사실 ‘Before Sunrise’는 내게 그렇게 기억에 남을 만큼 재미있게 본 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이제 이 영화는 내 기억에 영원히 남을 영화가 됐다. 사람이 지나온 삶의 시간, 사랑했던 그 시간들의 무게는 시계 침에 의해 결정되는 게 아니다. 지나간 시간의 선 위에서 일어났던 순간을 얼마나 많이 기억하고 써내려 갈수 있냐에 따른다. 누군가에겐 1년의 시간이 한 페이지로 족하고, 또 어떤이에겐 한 달의 시간이 1권의 책으로도 모자라다. 그 양이 곧 삶의 가치가 된다.

우연의 교집합이 모여 필연이라 부를 수 있을 정도가 됐다고 멈출 순 없다. 환경적 우연이 그 교집합을 만들어 색을 진하게 칠해줬다면, 이제 내 스스로 그 교집합에 색을 덧칠해야 한다. 더 이상 다른 색이 필요 없을 정도로 색이 찐해지면 그때는 그 교집합을 ‘운명’이라 말할 수 있으리. 운명이란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C 2-39C 2-40C 2-35C 2-34C 2-38C 2-37C 2-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