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Plan Korea
Columbia
Scott

2년 전인가..? 티웨이 항공에서 대만 취항을 한다고 무슨 대만 영화 패러디 이벤트를 한 적이 있다. 그때 그 이벤트에 당첨돼 가오슝 항공권을 받았었다. 그런데 갑자기 둘째 임신 사실을 알게 되고 또 그 임신이 유산 가능성이 있다고 해서 예약했던 항공권을 취소했었다. 다행히 티웨이 측에서 사정을 고려해 나중에 여건이 되면 항공권을 재발급해 주겠다 해서 놔두고 있다가 이제야 가오슝을 가게 됐다.

무료 항공권이 생겨 좋았지만 생각지도 않았던 가오슝의 정보를 찾아보니 딱히 매력적인 여행지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나 있다면 내가 아직 대만은 가본 적이 없다는 거.

하긴 애들 데리고 다니는 여행, 여기저기 돌아다니기도 힘드니 더운 나라에 야외 수영장이 있는 호텔이면 충분하다. 그런 생각으로 가오슝으로 떠났다.

 

출국하는 비행기가 아침 7시라 새벽부터 서둘러 움직인다. 공항에 도착해 수속 카운터에 가보니 줄이 엄청 길다. 아이가 있으면 편의를 봐주기도 하는데 여긴 그런 것도 없다. 기다리면서 찾아보니 7~8시 사이에 여기저기로 출발하는 비행기가 5대다. 5대의 비행기에 탑승할 승객이 한꺼번에 몰려 이런 짜증 나는 긴 줄이 만들어졌다. 아무리 저가 항공이라도 이런 스케줄은 좀 곤란하지 않나 싶다.

무려 한 시간을 기다려 탑승 수속을 마친다. 가오슝행 비행기가 한 시간 연착돼 망정이지 하마터면 늦을 뻔했다. 새벽같이 움직이느라 졸리고 피곤하다. 그나마 비행시간이 짧아 다행이다.

가오슝에 도착해 바로 호텔로 간다. 체크인 시간보다 4시간 일찍 왔지만, 빈방이 있어 바로 체크인을 받아줬다. 혼자 나가서 먹거리를 좀 사와 점심을 해결하고 바로 취침. 낮잠을 자고 일어나니 피로가 좀 가신다.

창문 밖 너머로 수영장을 본 인후가 수영, 수영외치면서 수영복을 찾아 꺼내 입는다. 그렇지않아도 너 때문에 고른 호텔이다 이놈아. 수영장에 그늘이 드리워져 있지만, 물이 미지근해 다행이다. 이나는 발리에서 물놀이 했던 기억이 사라졌는지 처음 수영장에 온 것처럼 물을 경계한다. 그렇게 두어 시간을 수영장에서 보내고 방으로 돌아온다.

다시 나 혼자 저녁거리를 사러 나온다. 인후의 호기심과 활동성이 감당이 안 돼 여행 중 식당에서 밥 먹는 건 오래전에 포기했다.

낮에는 그렇게 덥더만 해가 지자 좀 걸어 다닐 만하다. 낮에 느낀 이곳의 첫인상은 일본의 그것과 비슷했는데 어두워진 간판에 불이 들어오기 시작하자 홍콩과 닮은 느낌이 든다.

특별히 새로울 것 없다는 말이다.

 

일본풍 어쩌고 쓰여 있는 가게에서 도시락 같은 음식을 포장해 온다.

먹을만하지만, 또 갈 일은 없을 맛이다. 첫날 딱 맛집을 찾아놔야 편한데... 내일은 또 다른 식당을 시도해봐야겠다.

 

일어나자마자 아침밥을 사러 간다. 호텔 예약할 때 조식 포함 여부에 따라 가격 차가 많이 나서 고민하다가 근처에 유명한 아침밥 식당이 있다고 해서 조식 불포함 가격을 선택했었다. 홍륭거라는 식당인데 잠시 찾아본 정보로는 가오슝에서 꽤 유명한 식당 같았다. 과연 식당 앞에 줄이 길게 늘어서 있다.

만두 줄과 그 밖의 음식 줄이 있는데 만두 줄이 너무 길어서 포기하고 샌드위치 같은 빵만 산다. 찐만두가 육즙 팡팡 그렇게 맛있다는데...

원래 한국에서도 줄 서서 먹는 맛집은 가지 않는 편이다. 줄 서서 기다린 만큼 맛있었던 집은 거의 없었다. 사서 온 음식은 먹을 만한 맛이긴 하나 매일 아침 줄 서서 사 올만한 맛인지는 모르겠다. 어제 근처에 있던 비슷한 식당에서 찐만두를 사 먹었는데 그것도 그냥 보통 만두와 크게 다를 게 없었다. 그것보다 3배 이상 맛있지 않은 한 30분씩 기다릴 필요를 못 느끼겠고, 그렇게 맛있을 리 없다는 결정을 내렸다. 만두가 만두지 뭐 있겠어.

 

이번 여행도 언제나처럼 오전에 구경을 나갔다 오고 오후엔 수영장에서 지낼 예정이다.

애가 둘이라서 대중교통이 버겁다. 호텔 도어맨에게 오늘의 목적지인 용호탑까지의 택시비를 물어보니 우버로 찾아본 가격이 더 싸다. 앞으로 계속 우버를 이용해야겠다.

용호탑에 도착해 5분이 채 안 돼 땀이 줄줄 흐르기 시작한다. 아기 띠에 아이를 안고 있어 더 덥다. 얼른얼른 포인트만 골라 가서 사진을 찍는다.

태풍이 온다는 뉴스를 봤는데 날씨가 아주 화창해서 더워죽겠다.

용호탑에 대해선 뭐 설명하고 할 게 없다. 그냥 사진으로 봤던 게 다다. 언제나 그렇듯 아이들이 없으면 쉬엄쉬엄 쉬며, 음료 마시며 산책하듯 걸으면 좋겠지만 인후 자식 때문에 그게 안 된다. 잠시라도 멈추면 징징거리고 조금만 한눈을 팔아도 눈앞에서 사라지니 말이다.

용호탑을 위시한 롄츠탄 호숫가의 볼거리를 후딱 둘러보고 구경을 마친다.

 

아이들 낮잠을 재우려는데 위층에서 공사하는지 드릴 소리가 심하다. 방이 울릴 정도라 짜증이 나서 리셉션에 가서 좀 투덜거린다. 다행히 그사이에 아이들은 잠이 들었다. 잠시 후 호텔 매니저가 오더니 공사는 오늘 중에 끝날 거라며 미안하다고 남은 기간 조식 이용권을 주겠다고 한다. 굳이 뭘 바라고 그랬던 건 아니었는데... 준다니 감사히 받겠습니다 하고 한껏 너그러운 미소를 지어준다. 아침마다 홍륭거에서 줄을 서야 하나 싶었던 차에 조식 문제가 단번에 해결돼 기분이 좋아진다.

 

낮잠에서 일어난 아이들과 수영장에서 놀고, 해가 진 후 love river라 불리는 아이허 강가로 슬슬 걸어간다.

큰 기대 없이 강바람이나 쐴 요량이었는데 생각보다 분위기가 좋다.

괜히 기분이 좋아져 강가 옆 식당에 앉아 맥주를 주문한다. 언젠가부터 통풍이 심해져서 웬만하면 술, 그중에서도 맥주는 안 마시고 있지만, 이런 분위기를 위해서라면 한 번 정도 고통을 각오할만하다. 인후에게 애니메이션을 틀어주고 오랜만에 분위기를 내본다.

기대한 바가 전혀 없는 여행에서는 조금만 괜찮다 싶은 순간이 와도 마냥 행복하다. 결국, 여행이란 이런 순간을 수집하는 행위가 아니겠는가.

건너편 테이블에 한 아버지와 아들이 보인다. 인후보다 고작 한두 살 많이 보이는 아이였는데 그렇게 부자 둘이 앉아 노닥거리는 모습이 왠지 정겨워 보인다. 나는 언제쯤 아들과 둘이 저런 시간을 가질 수 있을까? 하며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결국 그 아버지도 아이에게 핸드폰으로 애니메이션을 보여주고 혼자 심심하게 음료를 마신다. 아빠란 쉽지 않은 것이다.

작은 라이브 뮤직이 흐르는 강가에서 기분 좋게 맥주를 마시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아침 뷔페를 먹으러 간다. 공짜라고 기분 좋게 식당에 들어섰는데 정말 형편없는 뷔페다. 공짜가 아니었으면 화가 났을지도 모른다. 아침이긴 하지만 뷔페에서 한 접시만 먹기는 처음이지 싶다.

 

오늘은 옛 영국 영사관에 간다.

딱히 관심을 끈 요소가 있다기보다 가오슝의 볼거리 중에서 그나마 호텔과 가까워서이다. 오픈 시간 전에 도착해서 근처 바닷가를 조금 둘러본다. 가오슝이 우리나라 부산과 비슷한 포지션이라고 하더니 항구에 많은 선박이 보인다.

문이 열리고 영사관에 들어서는 순간 언덕 위로 올라가는 계단을 보고 뜨악 한다. 이런 오르막이 있는 줄 알았다면 오지 않았을 거다. 투덜거리며 아이를 아기 띠에 채우고, 유모차를 들고 끙끙거리며 계단을 오른다. 땀이 줄줄줄. 난 어디 오르는 게 끔찍이도 싫다.

이곳은 기대대로 딱히 볼 게 없다.

바닷가 언덕 위에 있어서 바람이 불어 좀 시원한 것 말고는 입장료 99달러 (3,800)가 좀 아깝다.

그래도 힘들게 올라왔으니 차라도 한잔 마셔야지. 그늘에 앉아 아이스티 한 잔을 마시고 내려온다.

 

숙소로 돌아와 또 수영한 후 점심을 사러 간다. 면 요리를 좋아하는 내게 대만의 우육면은 지나칠 수 없는 음식이다. 근처 나름 유명한 식당에서 우육면을 사 온다.

국물은 먹을만한데 면에서 텁텁한 밀가루 맛이 나 별로다. 근데 생각해보면 중국에서도 그렇고 어디서든 우육면 면에서는 그런 맛이 난다. 중국 사람이 이런 맛을 좋아하는 건지, 덜 정제된 밀가루를 쓰는 건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

 

저녁엔 리우허 야시장에 가본다. 루시펑 야시장이 더 볼만하다 들었지만 리우허 야시장이 숙소에서 슬슬 걸어갈 만 거리여서 그곳을 선택했다.

야시장은 기대하지 않은 만큼 별 볼거리가 없다. 번잡스러워서 애들과 한쪽에 자리 잡고 뭔가 먹어볼 생각이 들지 않을뿐더러 먹어보고 싶은 것도 없다.

몇 대 야시장 그런 얘길 하던데 규모도 그렇게 큰지 모르겠다. 그냥 한번 둘러보고 나온다. 이럴 줄 알고 아예 저녁을 먹고 왔다.

저녁에 밖에 나오면 바람이 솔솔 부는 게 시원하니 걸을만하네 싶다가 어느새 땀이 옷을 적시곤 한다. 애를 안고 다니니 어쩔 수 없다.

 

오늘 코스는 치진섬이다. 고웅 등대와 치허우 포대에 가볼 생각이고 그 이후엔 상황을 보고 판단하기로 했다. 우버 택시로 선착장에 가서 배를 타고 치진섬에 도착한다.

여행객들은 선착장 앞에서 자전거나 스쿠터를 빌려 섬을 둘러보지만 우린 그럴 수가 없어서 우선 가까운 등대 쪽으로 걷는다.

조금 이른 시각이라 사람이 별로 없다. 그래서 그런지 작은 어촌 느낌의 길을 걷는 기분이 좋다. 난 여행 중에 작은 골목길 걸으며 동네 둘러보는 게 그렇게 좋다.

무슨 사연이 있을 법한 그런 길을 걸으며 그곳에서 일어났을 법한 일들을 상상하면 괜한 동질감도 생기고 사람 사는 게 다 그런 거지 하는 생각도 들고, 그러는 사이에 나도 모르게 이곳의 일원이 된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고.. 그냥 그런 느낌이 좋다.

하지만 그런 느낌도 잠시, 곧 등대로 오르는 오르막이 나타난다.

등대에 뭐 볼 게 있겠느냐마는 일로나가 가고 싶어 했고, 가오슝에 볼 것도 딱히 없고, 이런 데라도 오지 않으면 딱히 할 일도 없고... 하여간 땀 삐질삐질 흘리며 오른 등대는 역시 볼 게 없었다. 항구와 바다가 한눈에 펼쳐진 풍경이 그나마 볼거리였다.

등대에서 포대로 이어지는 길은 유모차를 끌고 가기 힘든 돌 박힌 험한 비포장길이다. 그러게 애들 데리고 여길 왜 왔을까 투덜거리며 포대로 간다.

포대도 뭐 그냥 그렇다. 전망 좋고, 좀 특색있는 건축물이니까 잘 찍으면 사진은 이쁘게 나오겠다.

포대에서 내려와 가까운 해변으로 간다. 그래도 섬에 왔으니 파도치는 바다 정도는 봐야지.

여행객들이 자전거 타고 다니는 모습이 보이는데 언덕을 오르락내리락하느라 우리는 벌써 기진맥진이다. 뭐 고민할 것도 없이 치진섬 코스는 이것으로 마무리한다.

 

여행 중 더위에 지친 몸에는 수영장만 한 게 없다. 아이들 때문이라고 핑계를 대기는 하지만 나 또한 물놀이가 좋다. 바다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수영장에라도 들어가야지.

 

한참 놀다 저녁을 사러 나온다. 첫날 먹었던 후라이드 치킨 덮밥과 또 다른 가게의 우육면을 시도해본다.

여기저기 다른 식당에 가봐야 메뉴도 죄다 한자뿐이고, 영어를 하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다른 메뉴 고르기가 쉽지 않다. 대만이 교육 수준이 떨어지는 나라가 아닐 텐데 동남아 국가들 여행할 때보다 의사소통이 더 어렵다. 여기도 중화에 대한 자부심 때문에 그러는 건지 모르겠다.

 

음식을 사러 왔다 갔다 하면서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여긴 보행자 신호가 50~90초로 굉장히 길다. 그런데 빨간불 기다리는 시간은 또 상대적으로 짧다. 신기해서 자세히 살펴보니 차량 신호가 직진과 정지밖에 없다. 그러니까 사거리 교차로에서 가로세로 도로가 번갈아 가며 직진 신호만 주고받는 것이다. 그러니 보행자 신호가 길고, 금방 찾아온다. 그럼 좌, 우회전은 어떡할까? 그건 그냥 직진 신호 받은 차가 좌우 보행자 건너는 거 살펴 가며 알아서 회전한다. , 우회전이 죄다 비보호 신호인 셈이다. 어떻게 보면 효율적이긴 한데, 또 어떻게 보면 위험하다. 보행자와 차량이 많은 곳에선 어떠할지 모르겠으나 묵고 있는 호텔 주변 교차로는 다 이런 신호 체계다. 그러니까 파란불이라 할지라도 건널목 건널 때 주의가 필요하다.

 

이틀이 남았지만, 비행기 시간이 이른 시각이기 때문에 실질적인 마지막 날. 마지막 구경 코스는 다카오 철도 박물관과 보얼 예술 특구다. 두 개가 이어진 곳이다. 철도 박물관부터 들린다.

다른 곳과 다름없이 딱히 볼 건 없다. 햇볕만 따갑지 않다면 그냥 산책하기는 좋겠다.

우리도 쭉~ 보얼 예술 특구 쪽으로 걸어간다. 중간에 작은 기차 타는 게 있어서 인후 한번 태워준다.

너무 더운 날씨라 슬슬 걷기만 해도 땀이 흐른다. 잠시 쉬며 아이스크림을 한번 먹고, 펑리수 공짜로 준다고 인기가 자자한 써니힐에 가서 차 한잔과 펑리수 하나 먹어본다. 맛은 좋은데 가격은 좀 비싸다.

예술 특구를 좀 둘러볼 생각이었지만 철도 박물관 끝에서 공짜 펑리수 먹어보겠다고 예술 특구 끝까지 걸어왔더니 진이 빠진다.

이곳은 날씨가 좀 선선해지는 해 질 녘에 오는 게 좋을 것 같다. 근처에 유명한 우육면 집이 있다던데 더위 때문에 모든 게 다 귀찮다. 더워 죽겠는데 사람들로 분주한 식당에서 유모차 움직이고, 애들 앉히고, 뜨거운 국물 먹고 하는 게 전혀 땡기지 않는다. 그래서 이곳 구경은 이것으로 마치고 숙소로 돌아온다.

 

매일 수영장에 갔더니 애들이 좀 지겨워하는 것 같아서 이번엔 동네 작은 공원에 가본다.

애들 놀이 기구 좀 있고, 벤치에 애들 부모와 할아버지 할머니들 있는 우리나라 동네 공원과 분위기가 비슷하다. 주변의 있는 나무의 종이 좀 다를 뿐이다.

인후는 별다른 이질감 없이 미끄럼틀을 타며 아이들과 어울린다. 어디나 그렇듯 아줌마들은 이나 연령의 아기에게 환한 미소를 지어준다.

자주 언급한 것 같은데, 난 여행에서 맞이하는 이런 일상의 느낌을 너무너무 좋아한다. 말 하나 통하지 않는 이역만리에 사는 사람들끼리 공유하는 이 평범한 일상. 세상 사람들이 이런 걸 자주 느낄 수만 있다면, 다름에 대한 혐오, 제노사이드 나아가서는 전쟁 같은 일들은 절대 벌어지지 않을 거라 확신한다. 그러니 여행만큼 세계평화에 이로운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별 볼 것 없는 가오슝이었지만, 코딱지만큼이나마 세계평화에 이바지했으니 이 또한 의미 있는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