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Plan Korea
Columbia
Scott

모리셔스의 일반적인 숙소는 대부분 부엌까지 갖추고 있는 풀하우스 타입이다. 호텔이라기보다 일반 집을 대여해주는 형식이라서 따로 리셉션이 있거나 매니저라 할만한 사람이 상주하거나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숙소를 보고 싶으면 문 앞에 붙어있는 전화번호로 전화해서 물어봐야 한다. 보통 집같이 생겨서 이게 숙손지 아닌지도 구분하기가 쉽지 않은 경우도 많다.

어쨌든 숙소에 도착에 들어가려고 하는 문이 굳게 닫혀있다. 심카드를 사지 않아서 택시 아저씨에게 부탁해 주인에게 전화를 건다. 통화한 택시 아저씨가 난감한 표정으로 주인은 3시에 문을 연다고 한다. 체크인 시간이 3시라고지금 시각 10. 뜨루도듀스의 작은 스튜디오에서 서둘러 탈출하느라 너무 일찍 도착했다. 체크인 시각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짐을 맡겨놓고 바로 앞에 있는 해변에서 기다리면 되지 싶었다.

택시 아저씨가 하늘 한번 쳐다보고는 건투를 빈다며 우산을 하나 주고 간다. 우린 많은 짐을 낑낑 끌고 해변 한쪽 나무 그늘에 자릴 잡는다

날이 흐려 그런지 물 때깔이 썩 와 닿지 않는다

그리고 비가 한두 방울씩 떨어지더니 갑자기 열대성 폭우가 쏟아진다. 다행히 애는 울지 않지만 추워질까 걱정. 또 밥을 먹여야 하는데 이 빗속에서 가방은 어떻게 열 것이며 분유는 어떻게 먹여야 하나. 일로나와 나는 잠시 미친 듯이 웃는다. 이 웃음은 우리가 낙천적이란 얘기가 아니다. 폭발 직전 마지막 남은 긍정의 기운이 발산되는 것이다. 우린 서로를 위로한다. 그래 이제 더는 악화될 상황 같은 건 없어.

아직 세시간을 더 기다려야 한다이대로는 안 되겠다. 취소 수수료를 물더라도 지금 당장 들어갈 숙소를 찾아야겠다. 일로나를 한쪽에서 기다리라고 한 다음 주변을 돌아다니며 숙소를 찾는다. 심카드가 없어 숙소처럼 보이는 곳은 무작정 들어가거나 담벼락 너머의 사람을 찾는 방법밖에는 없다. 여기저기를 둘러보다 해변 바로 앞 숙소에서 청소하는 사람을 발견한다. 가격을 물어보니 사전에 예약했던 숙소보다 조금 더 싼데 집 상태나 해변까지 거리가 훨씬 좋다. 예약한 숙소의 취소 수수료는 50%. 이틀을 예약했으니 하루 방값이다. 하지만 지금은 돈을 아까워할 때가 아니다. 아내와 애를 데리고 오겠다고 하고는 일로나에게로 간다. 그때 마침 먼저 예약한 숙소의 주인이 보낸 사람이 온다. 에잇! 더 좋은 조건의 숙소를 구해놨더니

그런데 그 사람이 애를 보더니 아기 침대를 쓰려면 15유로를 더 내야 한다고 한다. 비에 쫄딱 맞고 애를 돌보고 있는 우리의 상황을 이용하고 싶은가 보다. 난 기회다 싶어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그건 힘들겠다고 말한다. 그 사람이 그럼 취소하겠다고 세게 나오자 나는 바로 OK를 외치고 봐뒀던 숙소로 향한다. 그렇게 취소수수료를 굳히고 새 숙소에 도착해 짐을 푼다

이제 잴 것 없이 여기서 끝까지 머물 거다. 짐 싸기도, 그 짐을 들고 움직이기도 이젠 다 귀찮다.

비가 그치고 햇살이 든다. 그리고 블루베이란 그 이름에 걸맞은 푸른 바다가 눈에 들어온다

우리의 여행은 이제 진짜 시작이다.

바로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해변으로 간다

여긴 물이 너무 잔잔해 마치 수영장에서 수영하는 느낌이다. 파도가 치면 또 그 맛이 있지만 잔잔한 건 또 그래서 좋다

아닌 게 아니라 물가에서 출렁이는 파도에 겁을 먹었던 인후가 적어도 지난번 보다는 향상된 모습으로 모래밭에 앉는다. 며칠 더 지나면 물속에 들어갈 수도 있겠다.

모리셔스는 어딜 가나 물놀이하긴 좋은데 식당이나 가게가 잘 보이지 않는다. 차가 없으면 살기가 굉장히 불편한 나라다. 식당도 별로 없고 숙소에 부엌도 있고 해서 대형마트에 장을 보러 간다. 버스를 타고 20분 정도 가서 배낭 한가득 맥주와 먹거리를 사 온다

이곳에 온 이후로 마음에 드는 식사를 하지 못했다. 그래서 준비한 오늘의 만찬은 양갈비 스테이크. 인후도 긴 하루 피곤했는지 일찍 잠이 들어서 오랜만에 일로나와 둘이 맛난 고기를 안주 삼아 맥주를 마신다. 그리고 길었던 오늘 하루를 얘기한다. 아침에 겪었던 그 빌어먹을 상황이 진짜 오늘 일어난 일인지 벌써 까마득하다. 결국은 그것이 여행이고 그것이 인생인 것이로다.

인후는 아직 시차 적응을 못했다. 아니 우리가 그렇게 유도하지 않고 있다. 금방 돌아갈 텐데 여기 시차에 맞춰지면 가서 또 고생이다. 그래서 4 5시만 되면 일어나서 밥 달라고 칭얼대기 시작한다. 그 소리를 무시하고 싶지만, 그것도 일이십 분이다. 결국, 우리도 새벽같이 일어나 아침을 맞는다.

구비해놓은 식료품으로 간단히 아침을 해결하고 좀 뭉그적거리다가 바닷가로 가서 몸을 담근다. 물 때깔이 정말 예술이다. 바다가 바로 앞이지만 인후와 함께 나가면 이것저것 챙겨야 할 게 많아서 잠깐 몸만 적시고 올 때는 일로나와 번갈아 가며 숙소에서 인후를 본다. 숙소와 바다를 왔다 갔다 하며 대부분 시간을 보낸다.

환전도 해야 하고 기념품도 좀 사볼까 싶어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간다

마헤부르그라는 곳이 이 근방에서 제일 큰 도심이다. 그래 봐야 가게만 몇 개 더 있을 뿐 별 차이가 없다. 진짜 작은 나라다

물어물어 찾은 기념품 가게에는 정말 조악한 물건밖에 없다. 대항해시대 외부인의 침입으로 순식간에 멸종된, 모리셔스에만 서식했던 예쁜 도도새 기념품을 기대했는데 정말 형편없는 품질뿐이다. 어쨌든 이곳에 왔으니 작은 도도새 마그넷을 하나 산다.

기념품점에서 나와 걷다 보니 바다가 보여 또 그쪽으로 가서 바다를 바라본다. 여기나 저기나 물 때깔은 정말 끝내준다.

환전도 했겠다 그동안 고생도 했겠다 제대로 된 레스토랑에 들어간다

비싼 사슴고기 스테이크를 시킨다. 왜 여기서 사슴고기를 파는지 모르겠지만 먹어본 적이 없는 거라 한번 시켜본다. 푸짐한 요리가 나온다

모리셔스는 전반적으로 1인분 양이 많다. 지난번 택시 아저씨의 말에 따르면 모리셔스 사람의 비만도가 세계 1위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1인분이 충분히 배가 부를 만큼 나온다. 맛있는 고기, 맥주, 끝내주는 경치, 시원한 바람, 걱정 없는 앞으로의 일정. 이 모든 것이 주는 평안함에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이런 것이 행복인 거다.

숙소로 돌아와서 인후를 데리고 다시 바닷가로 간다. 처음엔 파도를 무서워하더니 잔잔한 바다에 오니 좀 괜찮아졌다

조금씩 조금씩 바다로 유인해 드디어 준비한 튜브에 앉힌다. 목욕하면서 물장난하는 걸 좋아해 당연히 바다를 좋아할 줄 알고 무작정 데리고 들어가 튜브에 앉혔더니 처음엔 어찌나 울고불고 내게 기어오르던지. 하기야 욕실 욕조하고 이곳하고 비슷한 분위기가 하나도 없는데 그저 물이라는 공통점 하나로 내가 너무 서둘렀다. 어쨌든 이제 막 즐거워하진 않아도 적어도 싫은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인후가 물속으로 들어와서 드디어 온 가족이 함께 물놀이를 할 수 있게 됐다.

우리 옆자리에 자리를 펴고 앉아있던 아줌마들이 인후 봐줄 테니 일로나랑 둘이 놀라 한다. 바로 앞이라 그러라 하고는 인후를 아줌마들 사이에 내려놓는다.

인후는 낯가림 없이 두리번거리며 아줌마들을 쳐다보다 주는 과자를 넙죽넙죽 받아먹는다. 인후가 혼혈이긴 하지만 여기선 동아시아계 아기가 별로 없어 사람들의 주목을 받곤 한다.

이곳엔 보통 아프리카계, 인도계 사람들이 많고 프랑스 사람들도 적지 않다. 미렐라 아줌마의 말에 따르면 모리셔스 사람들은 대부분 3개국어 이상을 구사한다고 한다. 프랑스어, 영어 그리고 아프리카계는 크레올, 인도계는 힌디. 4~5개국어를 구사하는 사람도 많다고 한다. 학교에선 영어로 수업하고, TV나 일상에선 프랑스말을 사용한다. 일반적으로 프랑스어가 주언어지만 영어도 다 하긴 한다. 프랑스 영화를 많이 봐서 흑인이 프랑스어를 하는 건 자연스러운데 인도계 사람이 프랑스어를 하는 건 좀 안 어울려 보인다. 어쨌든 언어 때문인지 이곳엔 프랑스 관광객이 많다. 프랑스어를 공식 언어로 쓰는 나라가 한둘이 아니지만, 이들은 다른 나라 사람들이 본인들의 언어를 쓰는 걸 보면 어떤 느낌이 들까? 저 멀리 어느 작은 나라에 갔는데 거기 사람들이 한국어로 말을 한다면 좀 이상할 것 같아 하는 소리다.

숙소 앞에 있는 해변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정말 환상이다. 푸른, 짙푸른, 다시 푸른, 짙푸른 그리고 파도 때문에 생기는 흰 거품 물살이 층층이 멋진 빛깔을 만들어낸다.

근처에 떠다니는 보트가 있어 작은 선착장에 가 본다. 역시나 보트투어가 있다. 한 시간에 800루피( 25,000). 한 이집트 친구가 붙어서 100루피 깎고 그 친구와 함께 보트에 올라탄다

투어라고 해서 여기저기 가는 줄 알았더니 그냥 고 앞에서 유리 바닥으로 만든 배 밑을 바라보며 산호 구경하고, 스노클링 한 번 하고 돌아오는 거다

더 멀리 돌아보는 투어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우린 인후가 있어서 천천히 움직이는 보트에 짧은 시간으로 끝나는 게 낫다.

이곳 물 때깔은 지금껏 가본 바다 중에 최고다

그런데 솔직히 바닷속은 그리 감동적이지 않다. 평범하다. 그러고 보니 모리셔스에서 다이빙한다는 소릴 들어본 적이 없다. 같이 배에 탄 이집트 친구도 바닷속은 이집트가 더 낫다고 한다. 그래도 뭐 이런 바다에 누워보는 것만으로도 큰 호사지. 짧은 시간이었지만 인후도 안 칭얼대고 보트 운전사 친구도 좋아서 나름 깔끔하게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숙소 위치가 해변 끝자락이어서 사람이 없어 좋았는데 주말이어서 그런지 사람이 많아졌다. 이곳 해변엔 현지 인도계 사람이 많고, 역시 현지 흑인 그리고 프랑스인으로 추정되는 중년 백인들이 가끔 보인다. 유명한 관광지지만 동떨어진 섬나라다 보니 젊은 배낭 여행객은 거의 없다.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유럽의 중년 여행객이나 그들의 가족도 많은 듯한데 그들은 대부분 프라이빗 비치가 갖춰진 리조트형 숙소에 묶어서 볼일이 없는 것 같다. 어쨌든 한적했던 해변이 시끄러워져서 좀 짜증 난다. 그래 봐야 조용하다 말할 수 없는 정도의 밀도지만

그동안 먹은 맥주병을 모아서 버스를 타고 마트로 간다. 병맥주는 병 보증금이 포함된 가격으로 팔아서 병을 갖다 주면 보증금을 반환해준다. 맥주 됫병 한 병이 59루피( 1,900)인데 병 보증금이 19루피이니 무시할 금액이 아니다.

모리셔스에서 유명한 맥주는 피닉스 비어다

이 나라의 유일한 맥주회사일 듯한 그 회사에서 만든 다른 두 종류의 맥주도 있지만 피닉스비어가 제일 낫다. 필스너 계열의 라거 비어인데 투박한 구수함이 느껴지는 맛이다. 역시나 우리나라의 맥주 맛 음료하고는 비교가 안 된다. 맛난 맥주는 맛난 안주는 요구한다. 오늘은 오븐에 구운 닭 한 마리와 함께 하루를 마무리한다.

이제 인후도 물에 잘 들어간다. 그래도 아직 썩 즐기는 것 같진 않다. 인후와 같이 있으면 말을 걸어오는 사람이 적지 않다. 오늘은 한 아저씨가 자기 딸도 처음엔 물에 안 들어가려고 발버둥 쳤는데 이젠 끌고 나와야 할 지경이라며 웃는다. 인후도 곧잘 놀 거라며... 엄마 아빠가 물놀이를 좋아하니 인후도 그래야 할 텐데.

애가 좀 더 크면, 계획대로 아이를 하나 더 낳으면 지금처럼 여행할 수 있을까? 우선 교통비니 숙박비가 확 뛰어오를 테고, 짐이 엄청 많아질 테고계획 중인 둘째가 아무 음식이나 먹을 수 있을 때쯤에나 다시 제대로 된 여행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러려면 적어도 5년 뒤. 그 전엔 한 곳에 눌러앉는 휴양 여행만 가능하겠지. 이번처럼 이렇게 멀리 오는 것도 자제하고

자전거 여행할 때 나름 험지라고 할 수 있는 파키스탄 카리마바드에서 대여섯 살쯤 되는 딸과 같이 여행하는 한국인 부부를 만난 적이 있다. 아무런 구별 없이 아무 여행객에게나 다가가서 잘 놀던 아이가 참 좋아 보였던 기억이다. 아이를 위한 최고의 선물처럼 느껴져 나도 아이를 갖게 되면 여행 많이 다녀야지 했더랬다. 뭐 이 여행이 꼭 애 좋으라고 하는 것만은 아니지만, 아이가 장차 이 여행을 기억하지는 못하더라도 기억 깊은 곳에 뭔가 어떤 인상이 남아 있을 순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아름답고 평화로운 바다. 젊은 여행객이 거의 없어서 좀 생기가 없는 면이 있지만 이런 바다를 앞에 두고 불평을 늘어놓는 건 심한 처사다. 인후 머릿속은 몰라도 내게는 오래 기억될 색깔이지 않을까 싶다. 모리셔스.. 즐거운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