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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8. Epilogue: 첫 매너리즘

2010. 6. 29. 02:28 | Posted by inu1ina2

카오산 로드는 내가 굉장히 좋아하는 장소 중 하나였다. 수많은 여행자가 뿜어내는 자유롭고 활기찬 에너지가 넘쳐나는 이곳은 가만히 있어도 흥이 나는 멋진 곳이었다. 국경을 넘어 방콕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벼워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카오산에 도착했을 때 왠지 모를 이질감이 느껴졌다. 명성에 따른 상업적 변화를 감안하더라도 내가 기대한 느낌을 받지 못했다. 왠지 카오산의 에너지와 나의 에너지가 서로를 밀어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난 이 여행자의 천국에서 이번 여행의 첫 매너리즘에 빠진다. Epilogue 1카오산에서 기대했던 것 중 하나는 한국인 여행자들과의 만남이었다. 굳이 한국인 여행자를 찾아 다니는 건 아니지만, 의아할 정도로 한국인과의 만남이 적어 편하게 대화할 수 있는 그들이 그리울 때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의 기대는 단순히 여행자의 대화가 아니라 친구의 그리움이 묻어있는, 그들과 나누어왔던 대화였던지라, 표면적인, 이젠 지겨운, 외국인과 영어로도 나눌 수 있는, 그런 단편적인 대화가 결국 나의 매너리즘을 부채질한 결과로 나타났다. 솔직히 말하면 한국인 숙소에서 만난 장기 여행자라고 하는 이들의 나태함이 꼴 보기 싫었다. 그들에게선 그 어떤 자유로움도, 새로움에 대한 갈망도, 생산적인 의욕도 없어 보였다. ‘여행'이란 단어가 주는 설레임은 이미 사라져버린 것 같았다.

카오산의 에너지는 신기루였던 것이었을까? 내 몽상 속에만 존재하는 나의 착각이었을까? 매너리즘은 마치 가위에 눌린 것과 같아서 빠져 나오려고 하면 할 수록 더욱 나를 옥죈다. 나는 뜨거운 열기에 헐떡이는 개의 혓바닥 마냥 축 늘어져있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렇게 카오산에서의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내고, 다시 자전거를 타고 달리기 시작하면서 매너리즘은 사라졌다.

같은 기간에 효일이에게도 매너리즘이 찾아왔다. 우리는 꼬부론 해변에 앉아 그 때를 회상하면서 그 매너리즘의 이유를 자전거 여행과 배낭여행의 차이에서 오는 이질감으로 결론지었다. 나에게 자전거는 여전히 세계일주를 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고, 자전거 여행을 특별하게 포장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그렇다고 모든 여행이 다 똑같다고 할 순 없다.

자전거 여행과 배낭여행의 가장 큰 차이는 숙소를 잡는 목적에 있다. 배낭여행에서 숙소를 잡는 것이 한 여행의 시작이라면, 자전거 여행에서는 한 여행의 끝이라 할 수 있다. 모든 사건과 만남은 길 위에서 일어나므로 숙소를 잡으면 쉬는 것 외에 할 것이 없다. 길 위에서 만나는 의외성에 길들여지다 보니 카오산에 놓여있는 정체된 상황이 성에 차지 않았던 것이다.

어느덧 여행 떠난 지 8개월이 됐다. 망우리 고개 넘기도 버거워하던 내게도 이제 노련한 자전거 여행자의 냄새가 나기 시작했을 거라 생각한다. 단지 돈 좀 덜 써보겠다고 선택한 자전거 여행이 이런 놀라운 경험을 선사할 줄은 몰랐다. 자전거를 타고 세상 구석 구석을 돌아다니며 낯선 사람과 술을 마시고, 손짓 발짓으로 웃으며 대화한다는 것은 정말 근사한 일이다.

우리가 만난 많은 자전거 여행자 중엔 여자도 있고, 나이 지긋한 아저씨도 있다. 맘만 먹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여행일 거라 생각한다. 길은 어디에나 놓여있고, 언제나 우릴 맞을 준비가 돼 있다.Epilogue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