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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12. Epilogue: 나의 기록

2010. 7. 27. 21:22 | Posted by inu1ina2

밤 늦게까지 도심을 헤집고 걸어 다닌 날 교통사고를 당하는 꿈을 꾸었다. 어딘지는 모르겠는데 친구 몇과 고속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가는 중이었다. 즐겁게 노닥거리고 있는데 구불구불 산길을 오르던 버스가 난간을 들이박고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정신 없는 사고현장에서 난 다친 데 하나 없이 주변을 수습하고 있었는데, 이거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열심히 캠코더를 돌리며 사고현장을 담는 꿈이었다.

군 입대하고 4주가 지났을 때 꿈속의 내가 군바리가 돼 있었다. 여행 시작하고 2달쯤 지났을 때 꿈속의 나도 여행 중이었다. 이제 여행과 상관없는 꿈을 꿔도 꿈 속의 난 항상 캠코더를 들고 있다.

10개월 동안 단 하루도 캠코더와 떨어지지 않았던 것 같다. 새로운 풍경, 새로운 사람, 새로운 음식… 하여튼 뭔가 흔치 않은 게 눈 앞에 등장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캠코더 전원을 켜는 일이다. 처음에는 장편 다큐멘터리를 기획했지만 이렇게 단편적으로 서너 컷 정도만 찍어서는 시퀀스 구성이 힘들어 장편화 하기 힘들다. 그저 블로그용 영상에 만족하며 열심히 여행을 기록할 뿐이다.Epilogue그런데 어느 날 문득 이 영상 기록이 우리 여행에 도움이 될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귀찮은 와중에서도 블로그를 운영하는 이유는 당연히 뭔가 재정적 보탬이 될 콩고물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좀 더 포장하고, 미화하고, 과장해야 하는 판국에 이 영상이 모든 걸 까발리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다른 여행자의 사진과 글을 보면서 그들의 경험에 놀라워하곤 하는데, 사실 따지고 보면 어떤 상황인지 다 짐작할 수 있는 거고, 나 또한 다 경험한 것들인데 수많은 순간 중 서너 개로 추린 멋들어진 사진과 글만으로 바라보니 더 커 보이는 게다. 인간의 상상력은 놀라워서 기본적인 정보가 제공되면 그 다음부턴 정보가 적으며 적을 수록 상상력이 커져서 그 대상이 더 대단하게 느껴지게 마련이다. 그러니 우리가 만들어내는 영상이 독자의 상상력을 갉아먹는 일등공신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래서 잠시 ‘영상을 접을까? 연출을 좀 해볼까?’하는 고민도 했었다. 하지만 이미 시작한 일이고, 다큐멘터리의 최대 미덕은 왜곡 없는 솔직함이다. 우리 여행이 좀 더 대단해 보이길 바라지만 멋들어지게 포장하고 싶진 않다. 그런 재주도 없다. 모든 문제는 내 자신으로부터 돌아봐야 한다. 내 행위의 모든 목적은 나에게서 기인해야 한다. 미화하고, 과장하고, 왜곡하는 일은 장사치들에게나 필요한 일이다. 가장 솔직하고 사실적으로 담아야 한다. 이 여행의 연장을 위한 목적은 두 번째다. 난 지금 노년이 된 나에게 줄 최고의 선물을 만들고 있는 중이다. 언제나 그것이 첫 번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