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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내가 살던 곳에서 4,000km가 떨어진, 내가 처음으로 해외 여행의 발을 디뎠던, 비행기를 타면 한 나절도 안 걸리는 네팔에서 이번 여행의 일주년을 맞았다. 일년이란 시간은 무엇을 이루기엔 부족한 시간이지만, 노력만 한다면 무언가를 알아내기엔 충분한 시간이다. 일년 동안 난 무엇을 알게 됐을까? Epilogue 1

난 그 인과를 따져 여러 가지 가능성을 수시로 계산하는 타입의 인간이다. 그것은 어떤 결과에 도달하기 위해 청사진을 그리는 목적의 계산이 아니라, 어떤 일이 벌어지든 당황하지 않고 대처하려는 목적의 계산이다. 군대 생활을 끔찍이 싫어하는 이유는 최악의 경우로 생각했던 수가 전혀 상식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내 계산에서 완전히 벗어나 더 악하게 치닫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 더 어처구니 없는 일은 그곳에선 그 모든 게 너무 당연한 듯 벌어진다.

타지를 힘들게 돌아다니는 만큼 자칫하면 위험한 순간들이 찾아올 수도 있기에 여행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머리를 굴린다. 그러나 이곳의 기본적인 정보가 부족하고, 내가 가지고 있는 정보들이 현실과 달라서 계산상의 오류가 많이 발생한다. 그런데 여행 중 겪게 되는 많은 오류들은 최선의 경우를 벗어나 지극히 상식적인 방식으로 더 좋게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 그것도 너무 당연한 듯 일어난다.

전자가 내가 예상했던 군대와 진짜 군대의 차이에서 오는 오류였다 한다면, 후자는 내가 알고 있던 세상과 진짜 세상의 차이에서 오는 오류라 할 수 있다. 34년을 살아오면서 진짜 세상이 어떤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Epilogue 2사기가 난무한다는, 전염병이 창궐한다는, 정세가 불안하다고 만류하는 곳에서 수 많은 사람과 술잔을 기울이고 ‘친구'를 외치면서 즐겁고 행복해했다. 난 절대 운이 좋은 사람이 아니어서 적은 확률 싸움에서 승리한 적이 별로 없다. 그런 내가 이번 만큼은 특별히 운이 좋아 60억 인구 중에 마음씨 좋은 사람만 골라 만나게 되는 건 아닐 것이다. 당연히 이런 사람들이 세상을 가득 메우고 있다고 밖에 믿을 수 없다. 솔직히 말하면 그건 나의 여행 방식이 주는 선물일지도 모른다. 세상은 지극히 상식적이어서 우리가 고된 만큼 타인의 동정을 많이 받을 테니 말이다. 그 이유 때문에 이 3D 여행을 멈추지 못하고 있다. 

난 매일 보고, 듣고, 느끼고 있다. 내가 원했던, 우리가 바랬던 세상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진짜 세상이라는 사실을 매일 확인하고 있다. 탐욕, 시기, 질투보다 사랑, 우정, 자비 같은 소중한 가치들이 세상에 더 광범하게 퍼져있다는 사실을, 드라마나 영화, 소설에서 진부하게 표현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해하는 그 가치들이 세상에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사실을, 그 값어치가 떨어져 사회와의 협상테이블에 하나 둘 내 놓았던 그 가치들이 진정 지켜야 했던 보물이었다는 사실을. 그게 진짜 세상이라는 사실을 이제는 확신할 수 있다.

적어도 내가 일년 동안 알게 된 건 진짜 세상의 모습이 이상적인 유토피아는 아닐지라도 세상이 아름답다 외치는 시인의 마음을 이해할 정도는 된다. 난 이 여행을 통해 진짜 세상의 모습을 알게 됐지만, 그건 어디서나 발견할 수 있는 모습이라 생각한다. 일년 동안 무거운 자전거를 타는 중노동을 해야 알 수 있는 사실이라 해도 이득이 되는 장사이긴 하지만, 마음만 먹으면 힘 하나 안 들이고 알 수도 있는 일이다. 우리가 그 진짜 세상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진짜 세상의 모습을 알게 된다면, 믿는다면, 행동한다면 그 소중한 가치들을 모두 손에 쥘 수 있다.

Epilogue 3

이래 말해도 저래 말해도 진부하고, 구태의연하고, 클리쉐하고, 식상하게 들리는 이야기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하지만 난 손발 오그라들게 하는 글을 버젓이 쓸 만큼 감상적인 사람이 절대 아니다. 많은 사람이 멋진 진짜 세상을 거부하면서 암울한 매트릭스 속에서 사는 게 아쉬울 뿐이다. 단지 그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