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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bia
Scott

C 13-1오늘은 날이 좀 화창하다. 어제의 우울함도 좀 가신듯하다. 그럼 또 열심히 달려보자꾸나.

우선 첫 번째 보이는 가게에서 땅콩버터 잼과 큼직한 빵 두 개를 산다. 애초에 이렇게 먹을 생각을 하고 남겨둔 금액이 20라리(약 13,000원)였다. 어제 비싼 밥이 아니었으면 과일 잼을 사는 거였는데 열라 싫어하는 땅콩버터 잼을 샀다. 그게 조금 더 저렴하고 포만감에 도움이 될 거라는 불쌍한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한참을 달리다 옥수수 밭 사이에서 빵을 꺼내 먹는다. C 13-3기회를 봐서 옥수수 서리를 하기 위해서다. 빵을 먹고 주변을 살핀 후 몇 개 따보니 옥수수가 아직 너무 작다. 옥수수서리는 포기한다. C 13-2

작은 오르막 내리막이 이어지는 가운데 고도가 계속 오르고 있다. 출발하기 전 체크해본 바로는 첫 70km 구간에서 1,500m 고지를 찍고 계속 내리막이 이어지는 패턴이었는데 완전히 반대로 가고 있다. 예상에서 어긋나면 짜증이 배가된다. 그러는 와중에 비포장길이 나타난다. 빌어먹을… C 13-5속도는 팍 줄고 큰 자갈에 휘청거리며 가고 있는데 옆을 지나던 차가 멈추더니 맥주를 들어 보인다. 그래 한잔하자.

그 친구들을 따라 길가에서 조금 벗어나니 작은 테이블이 있다. 시원하게 맥주를 들이킨다. 말은 전혀 통하지 않는다. 그냥 손짓 발짓 섞어 하는 이런저런 대화 속에 주된 애기는 우크라이나 여자가 끝내주니 꼭 가라는 것이다. C 13-4간단한 술자리가 끝나고 다시 달린다. 말이 맥주지 11도되는 맥주 2리터 페트 두 개를 세 명이 나눠 마셨더니 좀 알딸딸하다. 그리고 곧 제대로 된 오르막이 나온다.

구불구불 오르막에 자갈이 가득 깔린 비포장길은 정말 최악이다. 적당히 가다 포장길이 나오리라는 예상과 달리 끊임없이 오르막이 이어진다. 이런 길은 포장된 오르막보다 서너 배는 더 힘들다. 큰 돌멩이 하나 잘못 밟으면 휘청거리기 일수다. 한참을 그렇게 달리다 보면 온몸에 힘이 풀려 자빠지기도 한다. C 13-6그렇게 500m를 오르니 내리막이 보인다. 고도 1,500m. 이쯤에서 끝이겠지 싶었는데 잠깐 내려가다 또 오르막이 시작된다. 뭐야 이거! 이렇게 오랜 시간 비포장 오르막을 달리긴 또 처음이다. 별 사건 없이 끝날 줄 알았던 이 놈의 나라가 원치 않는 기억을 선사해주고 싶은 건가… C 13-7

걷느니만 못한 속도에 바람은 싸늘해지고 해질 시간이 다가온다. 꽤 먼 곳에 마을이 보인다. 아마 저 마을이 오르막의 끝이리라. 저 망할 마을 때문에 이 높은 곳까지 길이 나 있는 걸 테지. 그러면서 한 가닥 희망이 생긴다. ‘그래도 산동네가 인심은 좋지’. 침엽수림이 펼쳐진 길 사이로 겨우 마을에 도착한다. 일몰 시간은 한 시간이 남았지만 산이 높아 이미 해는 보이지 않는다. 고도는 어느새 2,000m. 안개가 가득해 춥다. 어디서 잠자리를 청할까 두리번거리는데 평평한 곳이 없다. 모든 집이 경사진 곳에 세워진 주상가옥이다. 꼬맹이들이 너무 몰려들어 좀 더 달린다. 그리고 손짓하는 두 친구를 만난다.C 13-8

집 근처에 텐트 하나 칠 공간은 있는 것 같아 접근한다. 물론 나의 목적은 그게 아니다. 역시나 집안 사람들이 나와 집으로 들라 한다. 자전거를 창고 같은 데에 넣고 집안으로 들어간다. 갑작스런 손님 방문에 분위기가 좋다. 다 큰 처녀들이 잔뜩. 그 중 하나는 갱스부르와 로만느 보링제를 섞어놓은 듯한, 산골동네에서 썩기 아까운 미모다. 나랑 상관없지만 그냥 그렇다는 얘기다. 갱스부르는 그저 그렇지만 보링제는 어릴 때 무지 좋아했었다.

어쨌든 나를 부른 친구를 중심으로 또 손짓발짓 대화가 시작된다. 그리고 곧 저녁상이 차려진다. 두 차례 만에 땅콩버터 잼과 빵이 지겨워졌는데 얼마나 좋은지. 작은 상이 모자를 만큼 가득한 식사다. 난 그 중에 소고기와 감자로 만든 스프를 공략한다. 이런걸 먹고 싶었단 말이다. 나만 먹으라고 따로 차려준 상이라 부담 없이 냄비 가득한 스프를 비운다. 맛있다.

산 높은 곳에 있는 집이라 따로 세면실은 없다. 떠다 놓은 물로 대충 씻는 식이다. 샤워를 못해 찝찝하지만 날이 추워서 땀만 대충 씻어내도 견딜만하다. 재미없게 끝날 줄 알았던 조지아의 또 하나의 즐거운 추억이 생기는 순간이다. 그리고 산골 인심은 역시 좋다는 사실도 확인.

다 올라와서 하는 말이지만 힘든 만큼 값어치가 있는 오르막이었다. 진짜 다 올라왔으니 이런 얘길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