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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비가 많이 내렸다. 텐트엔 송글송글 물방울이 맺혀있다. 밖에 나오니 여전히 이슬비가 내리고 있다. C 2-1환장하겠다. 찝찝함을 이루 말할 수 없다. 적당히 짐을 쑤셔 넣고 출발한다. 120km 지점에 카우치서핑 친구가 있다. 원래 더 멀리 있는 도시에 사는데 휴가 왔다며, 그 집으로는 사람을 부르지 않지만 다른 호스트를 못 찾으면 연락하라고 했었다. 난 오늘 무조건 거기 도착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찝찝해서 죽어버린 역사상 첫 희생자가 될지도 모른다.

가랑비를 맞으며 힘껏 페달을 밟는다. 오늘이 6일째. 몸도 많이 피곤하다. 다행히 곧 비가 그치고 구름도 걷힌다. 오랜만에 해가 비친다. 좀 더워졌지만 해가 있는 게 더 좋다. 주변은 변화 없이 똑같은 풍경이다. 해가 비추니 맑은 바다 빛이 들어난다. 왜 흑해라 하는지 모르겠다. 푸른 여느 바다와 다름이 없다. 곧 트라브존에 도착한다. C 2-2아마 북동부 흑해 연안에선 제일 큰 도시일거다. 을용이 형이 이곳에서 선수생활을 안 했으면 전혀 몰랐을 도시.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곳에선 카우치서핑을 구하지 못해 그냥 지나칠 거다.

그나저나 배가 고파 환전소를 찾아야 하는데 해안가 도로로 달리다 보니 도시 안쪽으로 접근하기가 힘들다. 가면 못 갈 것도 없지만 말이 해안도시지 육지 쪽을 바라보면 완전 산동네나 다름이 없어 들어가기가 겁난다. 무작정 들어가도 어디에 환전소가 있는지 몰라 헤맬 것이 뻔하다. 좀더 참아보자.

트라브존을 지나고 반대편에서 오는 자전거 여행자를 만난다. 일본 애들이다. C 2-3유럽사람만 보다가 일본 애들 보니까 많이 반갑다. 얘네는 포르투갈에서 출발해 일본으로 가는 중이고 여행 시작한지 일년 된 친구들이다. 이게 참 신기한데 우리나라 사람은 대게 우리나라를 시작점으로 잡는데 일본 애들은 일본을 끝 지점으로 잡는다. 자기나라를 떠나려면 배든 비행기든 타야 하는 상황은 같은데 일본 애들은 멀리 움직인 후 집으로 돌아오는 루트를 주로 선택한다. 일본 애들만 유독 그런다. 다른 나라 사람은 대부분 자기나라나 인근 나라에서 시작한다. 연구해 볼만한 일이다. 어쨌든 또 연락처를 챙겨 넣는다. 요코하마에 산다니 나에겐 좋은 위치다. 여러 나라 친구들이 언제든 찾아오라고 주는 연락처가 늘어날 때마다 기분이 묘해진다. 인생이 글로벌해지는 건가? 여기저기 잘 데가 많다는 건 역마살 낀 사람에겐 좋은 일이 분명하다. 인사를 나누고 헤어진다. 찝찝하게 시작됐던 하루가 햇볕과 다른 동료를 통해 조금은 가셨다. 그리고 목표한 지점에 도착한다.

이 아저씨는 특이하게도 주소가 아니라 위도 경도 좌표를 알려줬다. 포인트에서 전화를 한다. 트빌리시에서 만난 인도네시아 친구가 터키 심카드를 줬는데 남은 요금이 없어 안 된다. 옆에서 보고 있던 택시 운전사 아저씨가 대신 전화를 해준다. 그리고 에르산 아저씨를 만나 집으로 간다. 조그만 오두막집인데 일년에 한달 정도 와서 머무는 별장 같은 곳이란다. C 2-4백 년도 더 된 집이라 편의시설은 없다. 난 당장 빨래거리가 산더미라 오래 머물 순 없을 것 같다. 오늘 하루 자고 내일 바로 떠나야겠다.

지금 이곳엔 에르산 아저씨와 엄마, 누나, 누나의 딸이 와 있다. 해질 때가 돼서 저녁상이 준비된다. 상이 차려진 다음 라디오를 들으며 때를 기다린다. ‘애잔’이라 말하는 기도 시간을 알리는 낭송 방송이 나오면 그때부터 식사를 시작할 수 있다. 근데 라디오 방송이 트라브존에서 나오는 거고 이곳은 더 동쪽에 있어 해가 좀 더 늦게 지니 2분 후에 먹어야 된다고 한다. 굉장히 엄격하고 엄숙할 듯 하지만 그 시간 엄수를 설명해주고 시간이 돼서 먹기를 시작하는 순간까지 먹을까 말까 장난치며 웃기를 멈추지 않는다. 마치 아이들 놀이 같은 느낌이다. 그 와중에 아저씨의 노모는 쿨하게 음식을 먹기 시작하고, 좀만 더 기다리라는 아저씨의 말에 콧방귀 뀌며 ‘니나 잘해.’라는 듯한 말을 한다. 주변은 웃음바다가 된다. 원칙을 무너뜨리지 않는다면 그 속에서 융통성은 자유롭게 발휘돼야 한다. 융통성을 잃으면 나중엔 원칙을 잃은 체 세세한 규칙을 가지고 맞네 그르네 싸우기만 하게 된다.

밥을 먹기 시작한다. 쌀밥과 소고기 볶음, 샐러드. 배가 고픈 것도 있지만 그 동안 먹은 여느 나라의 밥보다도 우리나라 밥과 비슷하고 소고기볶음도 비슷해서 정말 맛있다. 너무 딱하게 보이지 않을까 싶어 적당히 먹고 숟가락을 놓는다. 그래도 배가 찰 정도는 먹었다.

밥을 다 먹고 에싼 아저씨는 차를 끓인다. 차를 엄청 진하게 먹는다. 이런 저런 흥미로운 얘기를 많이 들었는데 일기를 쓰는 지금 졸려서 더 이상 못 쓰겠다. 하여튼 대화를 마치고 없는 줄 알았던 샤워부스에서 죽지 않을 만큼 차가운 물에 샤워를 하고 창고처럼 쓰이는 듯한 방을 제공받고 자려한다. C 2-5결론은 6일만에 제대로 된 샤워를 해서 좀 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