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Plan Korea
Columbia
Scott

불가리아의 작은 도시 파자르칙에서 두 달을 보내고 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진전되는 연애를 해본 적도 없고, 타 문화권의 사람과 지낸다는 게 너무 생소할 뿐만 아니라 말도 매끄럽게 통하는 게 아니라서 앞날을 쉽게 예측할 수 없었다. 여행 중의 로맨스는 그 자체로도 달콤한 것이지만, 그냥 스쳐 지나가듯 재미있는 경험 한번 했다는 식으로 '나와 잠자리를 갖은 여자 우하하하!' 하며 한심한 자랑질 따위, 그리고 그런 바보 같은 기대를 충족시켜주고 싶지 않았다. 두 달이 지난 지금. 이제 그녀와의 시간을 포스팅해도 될 것 같다.C 18-6

그녀의 이름은 일로나 페이츠. 세르비아 인이다. 이곳엔 발룬티어 활동을 위해 머물고 있다. 유럽 전역에 이런 친구들을 볼 수 있다. 유럽은 자원봉사 활동이 굉장히 활성화 돼있구나... 싶었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자원 봉사하는 친구들이 모두 남을 위한 봉사의 마음이 투철해서 그러는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하는 일이라곤 하루에 서너 시간 아이들이나 장애인들과 함께하는 간단한 프로그램들이고, 주거와 관련된 비용은 모두 기관에서 지원된다. 거기에 소정의 생활비도 나오니 경험 삼아 혹은 여행 삼아 신청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해당지역 관리자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이곳 매니저인 이보는 좋게 말하면 유들유들 좋은 거고, 나쁘게 말하면 철저하지 못해서 대부분 적당히 적당히 처리하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일로나는 나이가 있어서인지 학생이 대부분인 자원봉사자를 관리하는 수퍼바이져의 일을 하는데, 가끔 보면 매니저인 이보의 지시로 가라 영수증도 만들곤 한다. 그러니 서로 서로 죽이 맞아 엄한 프로그램을 만들어 그 비용을 사적으로 유용하기도 하고 다른 곳에 돌려 쓰기도 하는 것 같다.

처음엔 그게 참 한심하게 보이고, 돈이 낭비되는 것 같이 느껴졌다. 하지만 상위 기관에서 그걸 모를 리 없을 거다. 이렇게 유럽전역을 대상으로 하는 단체처럼 그 규모가 거대하다면 완벽히 통제하기는 불가능하다. 어쩌면 그런 융통성이 자원봉사 활동에 대한 접근을 쉽게 만들지도 모른다.

혹시나 해서 우리나라 자원봉사 단체를 찾아보다 코이카의 지원 항목을 보니, 대부분 기능직에 있는 사람만 지원 가능한 시스템이었다. 그러니까 특별한 기술이 없는 사람은 남을 돕고 싶은 마음이 충만해도 그런 기관을 통해선 도움을 못 준다는 의미가 된다. 이곳에서 낭비될지 모르는 어떤 비용을 통해서 유럽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면 그런 기관을 통해 쉽게 남을 도울 기회를 제공받는다. 그런 경험이 자원봉사를 경험한 모든 이들에게 삶의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잡진 않을 테지만, 적은 수라도 지속적으로 그런 사람을 만들어낼 수 있는 시스템인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나라는 엘리트를 이용하는 사회이고, 이쪽은 엘리트를 만들어내는 사회라는 느낌이다. 어느 쪽이 바람직한지는 말할 필요조차 없다.

어찌됐건 일로나가 제공받은 집에서 나는 집세 걱정 없이 편하게 지내고 있다. 처음 소피아에서 이곳으로 다시 돌아올 때 약간 의아한 구석이 있었다. 지금 내게 뭐 볼게 있다고 내게 마음을 두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자기 비하라기보다 돈이 많은 것도, 잘난 얼굴도 아닌데, 더구나 여행 중엔 더 엉망인 몰골에 더 쪼들리는 생활을 할 뿐만 아니라 아시아계 남자는 세계에서 제일 매력 없는 인종으로 분류되는 걸로 알고 있는 있으니 말이다.

예전에 한 결혼정보회사에서 흘러나온 조견표를 보니 나의 점수는 -10점이었다.  빵점만도 못하다니... 그런 점수 매기기 행태가 나와 전혀 관계없는 부류의 일들이다 보니 전혀 기분 나쁠 일도 아니지만 그렇게 그들의 행태를 비웃고 있는 사이 나는 많은 여자와 담을 쌓게 되는 것이다. 돈을 쫓고 조건을 따지고 하는 여자가 한심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뭐 그리 좋아 뵈진 않지만, 모든 남자가 예쁜 여자를 찾는 것과 다를 게 없는 본능의 하나일 뿐이니까. 나는 그 동물적인 본능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난 사람을 만나면 그만.

결론인즉 아시아 남자가 매력이 없다는 건 북미 쪽 여자들의 의견인 것 같고, 유럽 쪽에서는 아시아 남자도 아시아 여자들처럼 어떤 이국적인 매력을 풍기는 것 같다. 그리고 요리를 하고 설거지를 하고 하는 것에 꽤나 점수를 줬다. 실제로 분담되지 못하는 가사노동을 나누는 건 모든 여자들의 바람일 테니...

관계를 쌓고 사랑의 마음을 키우면서 느끼는 건,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음에도 사랑하는 마음을 주고 받는 포인트는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미국에 살고 있는 아는 누나에게 외국인과의 연애에 대한 조언을 부탁했었다. 누나의 말인즉 쉽지만은 않다. 몸이 아파서 뜨근한 국을 먹고 싶은 데 피자를 가져온다 거나, 내가 어렸을 때 즐겨 듣던 레코드에 대한 추억이 공유되지 못할 때 공백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래도 어쨌거나 사랑할 사람은 다 하니 잘 해보라는 격려를 해 주었다.

맞는 말이다. 그 다름에 힘든 순간도 올 것이다. 하지만 좋게 생각하면 맨날 똑같은 밥이 아니라 특별 식을 먹을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일로나하고는 음악 취향이 너무 비슷해서(사실 난 이 부분이 굉장히 중요하다) 김광석을 들으며 눈물을 흘릴 순 없겠지만, 스타벅스가 아닌 펄잼 때문에 시애틀에 가고 싶다는 마음을 공유할 수 있다.

시간이 지나고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느끼는 건 놀라울 정도로 잘 어울리는 짝이라는 사실이다. 적어도 난 그렇게 느껴진다. 이렇게 내 짝 만나게 될 줄이야. 그러면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진지하게 미래에 대한, 앞으로 뭘 먹고 살아야 하나 사는 걱정이 시작됐다. 원래 지금 고민해도 해결되지 않는 걱정은 아예 신경 쓰지 않는 성격인데, 순간순간 걱정이 된다. 이렇게 두어 달 있다 굳바이 할 관계가 아닌데 어떻게 해야 하나...

되도 않는 걱정을 집어치우고 우선 누나에게 부탁해 한국어 교재와 다양한 먹거리를 공수 받았다. C 18-12나는 영어 공부를 하고 일로나는 한국어 공부를 시작했다. 내가 애국자는 아니지만 한글만큼은 누구보다 자랑스러워 한다. 한글은 정말 알면 알수록 훌륭한 문자다. 근데 한글 교재를 보고 일로나가 공부하는 걸 도와주면서 보니 한글은 쉽고 훌륭한 문자임이 분명하지만, 한국어는 정말 골치 아플 정도로 어려운 언어다. 도대체 동사는 졸라 다양하게 변화하는데 그 규칙을 뚜렷하게 설명할 수가 없다. 어떻게 설명해 줘야 하나 하며 인터넷을 뒤지다가 이 글을 보고 웃지 않을 수 없었다.

1. 시제로 구분(대충 52개)
과거 일반 - 먹었다, 먹었소
과거 반말 - 먹었어
과거 높임말 - 먹었어요, 먹었습니다, 드셨어요, 드셨습니다, 잡수셨어요, 잡수셨습니다.
과거 의문 - 먹었습니까?
과거 반말 의문 - 먹었어?, 먹었니?, 먹었냐?
과거 높임말 의문 - 먹었어요?, 먹었나요?, 드셨나요?, 드셨습니까?, 잡수셨어요?, 잡수셨습니까?
미래 일반 - 먹을 것이다, 먹겠다
미래 반말 - 먹을 거다, 먹을 거야, 먹을래
미래 높임말 - 먹으세요, 드세요, 잡수세요
미래 의문 - 먹을 겁니까?
미래 반말 의문 - 먹을 거야?, 먹을 거니?, 먹을 거냐?
미래 높임말 의문 - 먹을 거예요?, 먹을 건가요?, 드실 거예요?, 잡수실 거예요?, 먹을래요?
현재 일반 - 먹다, 먹는다
현재 반말 - 먹어, 먹자
현재 높임말 - 먹어요, 드세요, 잡수세요, 먹으세요
현재 의문 - 먹습니까?
현재 반말 의문 - 먹어?, 먹니?, 먹냐?
현재 높임말 의문 - 먹어요?, 드세요? 잡수세요? 먹으세요?

이런, 이제 겨우 시제로 구분했는데 징하게 많네.
(괜히 시작했다)

2. 태로 구분(대충 50개)
피동태 - 먹히다
피동태 과거 - 먹혔다, 먹혔었다
피동태 미래 - 먹히겠다, 먹힐 것이다
미동태 반말 - 먹혀
피동태 과거 반말 - 먹혔어, 먹혔지, 먹혔네
피동태 현재 반말 - 먹힌다
피동태 미래 반말 - 먹힐 거야, 먹히겠어, 먹히겠네
피동태 과거 높임말 - 먹혔어요, 먹혔지요, 먹혔네요, 먹혔습니다
피동태 현재 높임말 - 먹혀요
피동태 미래 높임말 - 먹힐 거예요, 먹히겠어요, 먹히겠네요
사동태 - 먹이다.
.
.
.
아 귀찮아

3. 기타 100여개? 에잇 몰라.

또 위키페디아엔 어떤 저명한 언어관련 기관에 조사에 따르면 네이티브 영어권 사람들이 가장 배우기 어려운 언어가 한국어라는 정보도 있다.
그래서 손을 놓고 궁금해 하는 것만 설명해주고, 한국 가서 제대로 된 학교에서 배우라고 얼버무리고 있다. 나도 어느 정도 영어 소통이 수월해지면 세르비아어를 배워야 할 텐데, 잠깐 들어보니 슬라브 계열의 언어도 장난이 아닌 것 같다. 아휴 골치 아파.

골치가 아플 땐 자전거를 끌고 바람을 쐬러 나간다. 샌드위치를 만들어 근처 한갓진 곳까지 자전거를 타고 나가 소풍을 즐긴다. 일로나는 초짜라 작은 오르막에도 쉽게 지친다. 그래도 내가 자전거 타고 여행을 하니까 자전거 타는 거 좋아하는 줄 알고 싫은 내색 없이 또 자전거 타러 가자고 하는 게 귀엽다.C 18-4C 18-2C 18-3C 18-5C 18-1

5월에는 이곳에서 일로나의 친구 결혼식이 있었다. C 18-8예전에 같이 발룬티어 활동을 하던 아르메니아 친군데 이곳에서 만난 불가리아 남자와 결혼을 하게 된 거다. 역시 같이 일했던 오스트리아인 마야도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왔다. C 18-7같이 일을 하면서 꽤나 죽이 잘 맞았던 모양이다. 불가리아 전통 방식이 아닌 영국 스타일로 한다는데 전체적인 과정이 우리나라 결혼식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른 게 있다면 결혼식이 무지 길다. 간단한 식이 끝나고 나면 계속 음악이 흐르고 다들 춤을 추고 논다. 우리나라 결혼식이 너무 형식에 치우쳐 좋지 않게 보이는데, 너무 길어서 좀 귀찮았다. 이런 결혼식은 정말 친한 사람만 불러야겠다.  낮에 시작해 밤 12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보통은 새벽 4시까지 춤추며 논다고 한다.  C 18-10C 18-9

한번은 새벽에 지진이 났었다. 3시경이 집이 흔들려 잠에서 깼는데 일로나가 호들갑을 떨며 짐을 챙겼다.

"뭐해?"
"나가야지. 지진 난 거 아냐?"
"어. 지진인 것 같은데... 나가야 돼?"
"그럼 나가야지. 좀 있다 더 큰 게 온다고."
"그래? 나 이런 경험 없어서 모르겠어."
”한국엔 지진 안나?”
“나긴 할 텐데, 몸이 느낄 정도로 심한 건 없었어.”

난 잠결이라 옷 챙겨 입고 나가기가 귀찮아서 꾸물거리고 있는데, 일로나도 어찌해야 할지 잘 판단을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옆집 문소리가 나서 나가 물어봤더니 그 집도 대피한다고 해서 대충 옷 입고 여권, 카메라를 챙겨 나갔다. 나가서 물어보니 이렇게 한번 오고 큰 게 온다고 한다. 자기도 어렸을 때 한번 지진을 경험했다고 한다. 밖에 나가 벤치에 앉아 있으니, 동네 사람들 몇몇도 간단한 짐을 들고 나와있다. 나는 그냥 졸립고 귀찮았다. 캠코더를 만지작거리며 건물이 무너지면 굉장한 장면이 찍히겠다 하고 있었으니 지진이라는 게 내 피부에 와 닿지 않는 게 분명하다. 한 30분 정도 기다려도 별일이 안 일어나니 사람들이 하나 둘씩 집으로 들어가고 우리도 들어갔다. 다시 침대에 누워 자려고 하니 그제서야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이거 한번에 골로 가는 거구나. 일본 사람들 어떻게 사나 모르겠네...

6월 16일에 오스트리아 빈에서 '레인보우 퍼레이드'가 있다. 일로나의 보스이자 이곳 발룬티어 매니져인 이보가 게이라서 그곳으로 여행계획을 짰다. 일로나와 이보의 게이 친구는 페트코는 그쪽에서 비행기 값을 마련해주고, 잠자리는 같이 일했던 빈에서 사는 마야가 마련하기로 했다. 나도 90유로의 비행기 값을 내고 같이 가기로 했다. 갑작스레 오스트리아 여행이 마련됐다. 레인보우 퍼레이드엔 관심이 없다. 빈이 아닌 다른 곳이었다면 안 갔을지 모른다. 'Before Sunrise' 영화를 언급했었다. 우연치 않게 그 영화와 비슷한 상황이 벌어진다고 매치하면서 그 영화의 낭만을 흡수하려 했다. 그리고 또 우연치 않게 빈에 가게 됐다. 영화는 두 주인공이 빈을 돌아다니며 노닥거리는 이야기다.

우연이 겹치고 겹쳐서 그 교집합의 색깔이 진해지면 사람들은 그걸 필연이라 말한다. 처음 일주일 동안은 잠에서 깰 때마다 1cm지만 나보다 큰(키가 다 자란 뒤 나보다 큰 여자는 처음 본다) 금발의 여자가 옆에 누워있어 깜짝깜짝 놀랐다. 하지만 이제 일로나와의 만남이 점점 단순한 로맨스로 끝나기를 거부하는 듯한 느낌이다. 더불어 앞으로의 여행이 어찌될지 모르겠다. 애초의 계획은 이곳에서 스페인으로 다이렉트 이동 후 남미로 넘어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남미 행은 접었다. 스페인에서 끝내야겠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 계획도 어찌될지 모르겠다. 우선 상황을 좀 더 지켜봐야지. 그리고 우선 연애질에 더욱 집중하련다.

피에스)
한 방문자 분이 일로나와 근사한 식사를 하라며 후원금을 보내주었다. 여행 후원금이 아닌 식사 대접용이라는 주의사항과 함께.. 덕분에 근사한 배터지는 식사를 할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인증샷 남깁니다.C 18-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