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14. Before 4pm (4월13일 am 9:30 ~ 4월14일 am 1:00)
2012. 4. 21. 04:36 |짐을 싼다. 미하일과는 같이 뭘 하지 못해서 좀 미안하다. 한국친구 만났다고 이렇게 쏙 가버리는 것도 미안하고…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 인사를 하고 한국 친구 의석이가 있는 집에 간다.
짐을 풀고 바로 기차역으로 간다. 파자르칙의 그녀가 볼일이 이어 소피아에 온다고 만나자고 했다. 기차가 도착하고 그녀가 나타난다. 반갑게 포옹한다. 누군가는 떠나가고, 누군가는 돌아오는, 수많은 사연을 간직하고 있을 이런 공간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그 재회에 반가워 해본 지가 언제였던가. 그 시간의 간격만큼 달콤함도 크다.
지금 시각 11시. 그녀는 4시에 다른 일이 있다. 5시간 동안 같이 있을 수 있다. 그녀는 불가리아 인이 아니다. 낯선 곳에서 우연히 알게 된 두 이방인. 영화가 하나 떠오른다. 그렇게 우리들의 'Before 4pm’이 시작된다.
그녀는 줄리 델피처럼 말이 많으나 나는 에단 호크처럼 받아쳐 줄 수 없다. 한두 번 만난 여자와 이런 데이트를 해본 적이 없다. 과거 여자친구들은 모두 오랫동안 알고 지내온, 우정에서 사랑으로 발전한 경우다. 한마디로 이 분야에선 완전 쑥맥이다. 자연히 그녀의 리드에 따라 움직이게 된다. 영화를 좋아하는 그녀와 ‘Before Sunrise’ 얘기를 하며 거리를 걷는다. 지금 걷는 거리는 단지 멈추지 않고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일 뿐 주변의 배경과 무엇이 있느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한 낮이지만 영화에서처럼 작은 펍을 찾아보지만 부활절 연휴라 모두 문이 닫혀있다. 공원에 간다. 벤치에 앉는다. 벗꽃 같은 꽃 나무에서 바람에 따라 꽃잎이 떨어진다. 약간의 침묵이 흐른다. 내가 그녀에게 맘을 빼앗겼던 부분이 바로 이 침묵에 있다. 영어가 짧은 나는 대화 중에도 주로 대답을 하는 쪽이지 질문을 하는 쪽이 못 된다. 그것도 대부분 짧은 대답이 전부다. 그렇게 되면 침묵의 시간이 자주 발생하게 된다. 그녀의 집을 떠날 때 그녀가 말했다.
“우리가 대화를 하든 안 하든 아무 문제가 없어. 우린 침묵을 나누었던 거잖아.”
침묵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더불어 침묵을 나누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독일의 작가 발터 플렉스는 이렇게 말했다.
‘우정의 깊이는 서로 침묵하면서도 그것을 고통으로 여기지 않는 시간이 얼마나 지속될 수 있느냐로 증명된다.’
잠시 후 정말 놀랍게도 멀쩡하게 생긴 청년이 짧은 영어로 뭐라 뭐라 하며 구걸을 한다. 우리나라와 비슷하게 자기는 거지가 아닌데 이런저런 일이 생겨 차비가 필요하니 좀 도와달라는 얘기였다. 놀라운 우연이었지만 그 청년은 아무런 조건 없이 손만 내밀고 그녀가 꺼내준 동전 몇 개를 받고 사라진다.
“잰 우리에게 시를 써줘야 했어.”
“…?”
“왜 영화에서 주인공 둘이 강변을 걸을 때 한 거지가 시를 써주는 대가로 몇 푼 요구하잖아.”
“아! 맞다 맞다. 와우! 시를 써줬으면 차비를 다 줬을 텐데…”
우린 다시 일어나 걷는다. 공원 끝부분에 다다르니 한적하고 넓은 잔디밭이 펼쳐져 있다. 한 켠에 옷을 깔고 앉는다. 불가리아에는 도시 외곽에 집시촌이 있는 곳이 많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한 집시 아줌마가 나타나 손금을 봐줄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내가 좀 안다. 군대에서 할일 없을 때 수상학 책을 봤던 게 이런 도움을 주게 될 줄은 몰랐다. 집시 아줌마 대신 내가 그녀의 손금을 봐준다. 어설픈 해석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왠지 어떤 운명론이 존재할 것만 같은 느낌이기에 그녀의 손에서 그 어떤 운명을 찾아보고 싶지만 그 정도로 손금에 대해 알지는 못한다.
“시간이 얼마 안 남았네…”
좀 고민을 하다 말한다.
“니가 원하면 내가 다시 니네 집으로 돌아갈 수 있어.”
한참을 서로 바라본다. 푸른 눈동자가 신비롭다. 어렸을 때 이자벨 아자니를 좋아했었다. 그래서 푸른 눈동자에 대한 작은 판타지가 있다.
“우리가 지금 키스를 하면, 잠을 자러 가야 하나?”
라고 말한 것 같은데 정확히 알아듣지 못해 재차 물었다.
“뭐라고?”
다시 반복해서 말하기가 좀 그랬는지 바로 말을 꺼낸다.
“키스해도 돼?”
이게 참… 여자한테 이런 얘길 들어본 적이 없어서 뭐라고 해야 할지 잠시 멍 해진다. 나도 모르게 그냥 헛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입을 맞춘다.
연애를 오래 쉬다 보면 이런 게 그리워진다. 섹스에 대한 그리움은 크지 않다. 감정을 교감하고 있는 사람과의 스킨쉽, 체취, 체온 그런 것들…
“니가 떠나고 잠을 잘 수 없었어. 계속 니 사진, 비디오만 보고…”
“나도 니 사진 계속 찾아봤어….
다시 물을게. 니가 원하면 니네 집으로 다시 갈수 있어.”
아주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인다.
“뭐야.. 반응이 좀 뜨뜨미지근 한데.. 별론가 보지..?”
“아니야.. 아니야.. 돌아와줘.”
“그래. 그럼 월요일에 갈게.”
갈 시간이 됐다. 그녀의 다른 약속 장소로 발걸음을 옮긴다. 떠나야 할 시간.
“다시 돌아오는 거 힘들지 않아?”
“110km 야. 하루만 달리면 되는데 뭐.”
“그럼 월요일에 오는 거 잊으면 안돼.”
포옹을 하고 가볍게 볼에 뽀뽀를 한 후 그녀와 헤어진다. 난 그 자리에 앉아 담배를 하나 꺼낸다. 5m 앞에 구걸을 하는 할머니가 흐뭇한 미소를 띄우며 날 바라보고 있다. 담배를 다 피우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 집으로 향한다.
집에는 의석이와 그의 직장 동료가 와 있다. 곧 의석이가 요리를 준비한다. 어제 돼지고기 얘길 했더니 그것 때문인지 큼직한 돼지고기를 굽고, 소세지 야채 볶음에 상추쌈에… 진수성찬이다. 아예 포기하고 있어서 김치 생각은 거의 안 났는데, 이런 밥상이 차려지니 좀 더 완벽하길 바라며 김치가 생각난다. 인간의 욕심이란… 영국에서 어학연수를 하며 혼자 지냈다더니 요리 솜씨가 좋다.
맛있게 밥을 먹고 오늘 하루 일을 정리한다. 긴 하루였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지고 있다…라면 뻥이고, 예상은 졸라 했다. 맨날 그 생각만 했다. 하지만 내심 기대는 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이런 상황을 맞닥뜨리게 될진 몰랐다. 그것도 꽤나 멋들어지게 이어지고 있는 스토리. 과연 다음 이야기는 어떻게 이어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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