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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n Korea
Columbia
Scott

짐을 싼다. 미하일과는 같이 뭘 하지 못해서 좀 미안하다. 한국친구 만났다고 이렇게 쏙 가버리는 것도 미안하고…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 인사를 하고 한국 친구 의석이가 있는 집에 간다.

짐을 풀고 바로 기차역으로 간다. C 14-1파자르칙의 그녀가 볼일이 이어 소피아에 온다고 만나자고 했다. 기차가 도착하고 그녀가 나타난다. 반갑게 포옹한다. 누군가는 떠나가고, 누군가는 돌아오는, 수많은 사연을 간직하고 있을 이런 공간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그 재회에 반가워 해본 지가 언제였던가. 그 시간의 간격만큼 달콤함도 크다.

지금 시각 11시. 그녀는 4시에 다른 일이 있다. 5시간 동안 같이 있을 수 있다. 그녀는 불가리아 인이 아니다. 낯선 곳에서 우연히 알게 된 두 이방인. 영화가 하나 떠오른다. 그렇게 우리들의 'Before 4pm’이 시작된다. C 14-2

그녀는 줄리 델피처럼 말이 많으나 나는 에단 호크처럼 받아쳐 줄 수 없다. 한두 번 만난 여자와 이런 데이트를 해본 적이 없다. 과거 여자친구들은 모두 오랫동안 알고 지내온, 우정에서 사랑으로 발전한 경우다. 한마디로 이 분야에선 완전 쑥맥이다. 자연히 그녀의 리드에 따라 움직이게 된다. 영화를 좋아하는 그녀와 ‘Before Sunrise’ 얘기를 하며 거리를 걷는다. 지금 걷는 거리는 단지 멈추지 않고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일 뿐 주변의 배경과 무엇이 있느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한 낮이지만 영화에서처럼 작은 펍을 찾아보지만 부활절 연휴라 모두 문이 닫혀있다. 공원에 간다. 벤치에 앉는다. 벗꽃 같은 꽃 나무에서 바람에 따라 꽃잎이 떨어진다. 약간의 침묵이 흐른다. 내가 그녀에게 맘을 빼앗겼던 부분이 바로 이 침묵에 있다. 영어가 짧은 나는 대화 중에도 주로 대답을 하는 쪽이지 질문을 하는 쪽이 못 된다. 그것도 대부분 짧은 대답이 전부다. 그렇게 되면 침묵의 시간이 자주 발생하게 된다. 그녀의 집을 떠날 때 그녀가 말했다.

“우리가 대화를 하든 안 하든 아무 문제가 없어. 우린 침묵을 나누었던 거잖아.”

침묵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더불어 침묵을 나누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독일의 작가 발터 플렉스는 이렇게 말했다.

‘우정의 깊이는 서로 침묵하면서도 그것을 고통으로 여기지 않는 시간이 얼마나 지속될 수 있느냐로 증명된다.’

잠시 후 정말 놀랍게도 멀쩡하게 생긴 청년이 짧은 영어로 뭐라 뭐라 하며 구걸을 한다. 우리나라와 비슷하게 자기는 거지가 아닌데 이런저런 일이 생겨 차비가 필요하니 좀 도와달라는 얘기였다. 놀라운 우연이었지만 그 청년은 아무런 조건 없이 손만 내밀고 그녀가 꺼내준 동전 몇 개를 받고 사라진다.

“잰 우리에게 시를 써줘야 했어.”
“…?”
“왜 영화에서 주인공 둘이 강변을 걸을 때 한 거지가 시를 써주는 대가로 몇 푼 요구하잖아.”
“아! 맞다 맞다. 와우! 시를 써줬으면 차비를 다 줬을 텐데…”

우린 다시 일어나 걷는다. 공원 끝부분에 다다르니 한적하고 넓은 잔디밭이 펼쳐져 있다. 한 켠에 옷을 깔고 앉는다. 불가리아에는 도시 외곽에 집시촌이 있는 곳이 많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한 집시 아줌마가 나타나 손금을 봐줄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내가 좀 안다. 군대에서 할일 없을 때 수상학 책을 봤던 게 이런 도움을 주게 될 줄은 몰랐다. 집시 아줌마 대신 내가 그녀의 손금을 봐준다. 어설픈 해석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왠지 어떤 운명론이 존재할 것만 같은 느낌이기에 그녀의 손에서 그 어떤 운명을 찾아보고 싶지만 그 정도로 손금에 대해 알지는 못한다.

“시간이 얼마 안 남았네…”

좀 고민을 하다 말한다.

“니가 원하면 내가 다시 니네 집으로 돌아갈 수 있어.”

한참을 서로 바라본다. 푸른 눈동자가 신비롭다. 어렸을 때 이자벨 아자니를 좋아했었다. 그래서 푸른 눈동자에 대한 작은 판타지가 있다.

“우리가 지금 키스를 하면, 잠을 자러 가야 하나?”

라고 말한 것 같은데 정확히 알아듣지 못해 재차 물었다.

“뭐라고?”

다시 반복해서 말하기가 좀 그랬는지 바로 말을 꺼낸다.

“키스해도 돼?”

이게 참… 여자한테 이런 얘길 들어본 적이 없어서 뭐라고 해야 할지 잠시 멍 해진다. 나도 모르게 그냥 헛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입을 맞춘다.

연애를 오래 쉬다 보면 이런 게 그리워진다. 섹스에 대한 그리움은 크지 않다. 감정을 교감하고 있는 사람과의 스킨쉽, 체취, 체온 그런 것들…

“니가 떠나고 잠을 잘 수 없었어. 계속 니 사진, 비디오만 보고…”
“나도 니 사진 계속 찾아봤어….
다시 물을게. 니가 원하면 니네 집으로 다시 갈수 있어.”

아주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인다.

“뭐야.. 반응이 좀 뜨뜨미지근 한데.. 별론가 보지..?”
“아니야.. 아니야.. 돌아와줘.”
“그래. 그럼 월요일에 갈게.”

갈 시간이 됐다. 그녀의 다른 약속 장소로 발걸음을 옮긴다. 떠나야 할 시간.

“다시 돌아오는 거 힘들지 않아?”
“110km 야. 하루만 달리면 되는데 뭐.”
“그럼 월요일에 오는 거 잊으면 안돼.”

포옹을 하고 가볍게 볼에 뽀뽀를 한 후 그녀와 헤어진다. 난 그 자리에 앉아 담배를 하나 꺼낸다. 5m 앞에 구걸을 하는 할머니가 흐뭇한 미소를 띄우며 날 바라보고 있다. 담배를 다 피우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 집으로 향한다.

집에는 의석이와 그의 직장 동료가 와 있다. 곧 의석이가 요리를 준비한다. 어제 돼지고기 얘길 했더니 그것 때문인지 큼직한 돼지고기를 굽고, 소세지 야채 볶음에 상추쌈에… 진수성찬이다. C 14-3아예 포기하고 있어서 김치 생각은 거의 안 났는데, 이런 밥상이 차려지니 좀 더 완벽하길 바라며 김치가 생각난다. 인간의 욕심이란… 영국에서 어학연수를 하며 혼자 지냈다더니 요리 솜씨가 좋다.

맛있게 밥을 먹고 오늘 하루 일을 정리한다. 긴 하루였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지고 있다…라면 뻥이고, 예상은 졸라 했다. 맨날 그 생각만 했다. 하지만 내심 기대는 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이런 상황을 맞닥뜨리게 될진 몰랐다. 그것도 꽤나 멋들어지게 이어지고 있는 스토리. 과연 다음 이야기는 어떻게 이어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