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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국경 근처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기차가 멈춘다. 그 기회를 이용해 기차에서 내려 가게에 가니 다행히 불가리아 돈을 받는다. 환전소가 없어서 15,000원쯤 남은 불가리아 돈으로 물과 담배를 산다. 불가리아는 담배가 비싸서 내내 말아 피느라 귀찮았는데 세르비아는 우리나라보다 싸다. 그래서 그런지 말아 피는 담배는 없는 것 같다.

다시 기차에 오르고 기차가 출발한다. 잠시 후 세르비아 측 검표원이 티켓을 확인하려고 돌아다닌다. 티켓 검사를 하고, 곧 어두워져 잠을 청한다. 한참 졸고 있는데 검표원이 문을 활짝 열더니 자전거 실은 값을 내라 한다. 얼마냐 물으니 1유로(약 1,500원) 내라 한다. 마침 2유로 동전이 있어 내미니 고민을 하다 상관에게 동전을 받아도 되는지 물어보겠다며 사라진다. 고작 1유로 받아내려고 사람들 다 자는데 그런 소란을 피우다니. 그리고 1유로를 달라며 동전이라고 고민하는 꼴은 뭔가. 꽁쳐먹을 꺼리를 너무 무계획적으로 덤볐다. 한참을 기다려도 안 오길래 다시 잔다.

자리가 불편해서 숙면을 취하긴 힘들다. 날이 밝아오길래 GPS를 확인해보니 목적지까지 30km 정도가 남았다. 일어나서 담배 한대 핀다. 이 기차에선 모두 복도에서 담배를 핀다. 소변을 보러 화장실에 가니 그 옆에 묶어뒀던 자전거가 사라졌다. 달랑 두 량짜리 기차에 아시아인은 나 하나. 여기 있는 모두가 그 자전거가 내 것이라는 걸 안다. 사람들이 그걸 알고도 모른 척을 한 건지, 다른 사람들이 주목하기도 전에 락을 자르고 가져간 건지. 참 기술도 좋다. 세르비아의 환영인사인가? 자리에 돌아오니 일로나가 잠에서 깨 웃음을 지어 보인다. 도착하면 말해야겠다. 해결할 수 없는 쓸데없는 걱정거리를 미리 말할 필요는 없다.

일로나를 만나고 남미 여행 계획을 접었다. 스페인까지는 가려 했는데 날도 덥고, 연인이 생긴 마당에 혼자 돌아다니기도 싫고 해서 베오그라드에서 여행을 마칠 생각이었다. 한국에 가면 다시 자전거를 탈까 싶기도 하고, 비행기에 싣는 것도 비싸서 베오그라드에 가면 자전거를 팔아야겠다 싶었는데, 세르비아가 잘 사는 나라가 아니고 자전거 상태도 안 좋아서 팔려면 신경 좀 쓰게 생겼네 했는데 이렇게 깔끔히 고민거리를 없애주다니. 졸라 고맙다 씨발.

베오그라드에 도착한다. 일로나의 아버지가 마중을 나왔다. 영어를 못하셔서 어색하게 악수하며 첫인사를 나눈다. 자전거가 없어졌단 소식에 일로나와 아버지가 걱정을 한다. 난 그 사이에 마음을 정리해서 괜찮은데 오히려 나보다 걱정을 하니 내가 위로를 해줘야 할 판이다. 아마 본인의 나라에 대한 첫인상을 걱정하는 측면도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자전거가 사라져 모든 짐을 들고 움직일 수 없으니 일로나 아버지의 차에 짐을 싣고 연락해 둔 카우치서핑 친구네 간다. 일로나와 그의 가족이 머물 곳을 마련해 줄 예정이었는데, 내가 계획을 변경해 갑작스레 기차를 타고 와서 우선 카우치서핑 친구를 구했다. 친구 젤코의 집에 도착한다. 일로나는 집에 가고 나는 젤코의 집에 짐을 푼다. C 1-1

아직 이른 시간이라 젤코는 마저 잠을 청하고 나도 샤워를 하고 바로 잔다. 잠시후 출근하는 젤코에게 집 열쇠를 받고 일어난 김에 짐 정리를 한다. 큰 배낭 없이 페이너만 많으니 손이 부족해 짐을 들고 움직일 수가 없다. 일로나의 아버지가 자전거를 타신다고 하니 자전거 관련 부품을 따로 정리하고, 더 이상 갖고 있을 필요 없는 짐을 죄다 버린다. 텐트부터 해서 버리기 아까운 것도 많지만 방법이 없다. 배낭이 없는 이상 가져갈 수도 없고, 그거 가져가자고 배낭을 살 수도 없는 노릇. 법정 스님의 가르침을 맘껏 발휘해 최선을 다해 버린다. 버리는 물건 쪽으로 분류할까 말까 힘든 것도 한번 그쪽으로 분류된 이상 다시 쳐다보지 않는 냉정함을 보인 끝에 간신히 혼자 이동할 수 있을 만큼의 짐이 남는다. 이렇게 바로 떠날 수 있게 해 놓으니 속이 후련하다. 얼추 3년 가까이 동거 동락한 것들인데도 별 미련은 없다. 자전거는 그 역사의 증거물이라 좀 아쉽긴 하다.

한낮의 베오그라드는 36도가 넘는다. 무지 덥다. C 1-1잠 좀 자고 낮을 보낸 후 저녁에 일로나와 만나기로 했다. 남겨둔 라면 하나 끓여먹고 늘어져있다가 밖을 나선다. 젤코가 트램을 타고 가다 버스로 갈아타라 했는데 방향을 잘못 잡아 한참을 걷다 버스를 탄다. 요금이 얼만지 몰라 운전사에게 물어보니 그냥 타라는 시늉을 한다. 버스 타고 도착한 곳은 시내 중심에 있는 조각상 앞이다. C 1-2만남의 장소로 유명한 곳인지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북적 인다. 바보같이 일로나가 금발에 키도 커서 쉽게 발견할 수 있으려니 했는데 당연하게도 비슷한 여자들이 너무 많다. 미국영화를 많이 보니 그쪽 계통 사람들은 좀 익숙한데 슬라브 인들에 둘러 쌓여 있는 건 영 생소하다. 다들 키도 크고 늘씬늘씬하다. 날씨가 날씨인 만큼 옷차림도 과감해서 무슨 패션쇼 장에 온 느낌이다. 실제로 백인들은 살이 쉽게 찌는 체질이라 비만인 사람이 굉장히 많은데, 슬라브 계열 사람은 그렇지 않나 보다. 동유럽 여자가 예쁘다는 얘기가 나돌만하다. 나도 남자인지라 눈이 즐겁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일로나가 온다. 베오그라드에서 데이트를 하는 건 처음이라며 수줍어한다. 우선 목이 말라 좋아한다는 펍에 가서 맥주를 한잔 마신다. 분위기 좋다. 목을 축이고 나와 중심가를 걷는다. 멋진 건물들이며 많은 노천카페의 분위기가 좋다. 조금 외곽으로 빠져나오니 강변이 보이는 공원이 나온다. 많은 사람이 나와 자리를 잡고 맥주를 마시거나 하며 놀고 있다. 잠시 앉았다 좀더 걸으니 ‘칼라 메그단’이란 큰 성곽이 나온다 오스만 투르크 때 지어진 성이라는데 역시 공원처럼 꾸며놔서 슬슬 걸으며 산책하기 딱 좋다. 우리도 맥주를 사서 자리를 잡고 앉는다. 여기 정말 좋다. 멋있는 성곽, 넓은 잔디밭, 다뉴브 강변이 한눈에 보이고, 조명도 잘 해놨다. 그런 만큼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도 많아서 화장실이 없어 소변 좀 보려고 어두운 구석진 곳으로 가도 어디든 커플들이 숨어서 뽀뽀질을 하고 있다. 밤에 칼라메그단 산책을 추천한다. C 1-3

시간이 늦어져서 버스 타는 곳으로 간다. 12시가 넘으면 똑같은 버스가 야간 버스라 하여 두 배의 요금을 받는다. 낮에는 60디나르(약 740원), 밤에는 120디나르. 일로나를 먼저 태워 보내고 내 버스를 기다리는데 30분을 넘게 기다린 버스가 저만치에서 멈춰 사람들을 태우더니 그냥 가버린다. 하는 수 없이 4km를 걷는다. 밤거리가 멋있어 슬슬 둘러보며 걸을만하다. 발칸 지역 대부분을 차지했던 유고의 수도였던 만큼 잘 관리된 도시 같다. 어디서든 카메라를 들어도 멋진 건물들이 앵글에 들어온다. C 1-5C 1-4한번쯤 방문해 볼만한 도시 같다.

한 시간을 걸어 집에 도착한다. 젤코가 자지 않고 있어 좀 노닥거린다는 것이 중간에 말을 끊을 타이밍조차 주지 않고 말을 하는 통에 피곤해 죽겠는데 잘 이해도 안 되는 얘기를 한 시간 동안 듣고서야 샤워를 할 수 있었다. 눕기 전에 창 밖을 보니 야경이 좋다.C 1-6

세르비아라… 천재 니콜라 테슬라의 나라. 에밀 쿠스트리차, 네마냐 비디치, 노박 조코비치…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던 이 나라가 한국 다음으로 소중한 나라가 될 줄이야. 그래 일로나를 주고 자전거를 가져간 걸로 치자. 좋은 거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