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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1. 여행 종료 후 석 달

2012. 11. 2. 02:47 | Posted by inu1ina2

자… 어디서부터, 뭘, 어떻게 해야 하나…

여행을 계획대로 다 끝마치고 돌아왔어도 막막한 건 마찬가지였겠지만, 무언가를 깔끔하게 끝내지 못한 찝찝한 미련이 새로운 일상에 집중을 방해하는 듯한 느낌이다. 날씨는 또 왜 이렇게 더운지. 그간 이보다 훨씬 강렬한 햇살 아래서 자전거를 탔음에도 적응하기 어려운 더위다. 기온이 어느 수준 이상 오르면 진짜 덥고, 무진장 덥고, 작살나게 더울 뿐 더위를 덜 느낀다거나, 이 정도는 견딜 수 있다거나 하는 건 없다. 더운 건 그냥 더운 거다. 우선 일상으로의 회복을 위해 친구들을 만나 음주를 즐긴다. 여행을 끝나게 한 여자친구에 대한 궁금증이 완수하지 못한 장대한 여행 계획을 밀어내고 술자리의 주된 안줏거리가 된다. 여행할 때나 돌아와서나 새로운 이슈를 가지고 있으면 만나는 사람마다 같은 질문을 쏟아내고 나는 같은 대답을 반복한다. 그 관심이 싫지는 않다.

뜨거운 날씨에도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 그동안의 여행을 정리한다. 딱히 할 일도 없고, 그냥 혼자만의 추억으로 갖고 있기도 아깝고, 다들 그러하니 나도 책을 한번 써 볼까 하는 요량이다. 주변에선 출판사를 먼저 컨택하고 쓰는 거라고들 하지만 그냥 무턱대고 들이대는 게 좀 이상하기도 하고, 써놓고 맘에 들지 않으면 다 소용없는 짓이다. 길었던 여행이었던 만큼, 뭘 그리 주저리주저리 끄적여 놨는지 전체를 훑고, 정리하는 데에만 한 달이 걸렸다. 정리를 다하고 나서 컴퓨터 앞에 앉았지만 어떻게 시작을 해야 할지 막막하다. 단편 영화 시나리오나 심심풀이 소설을 써본 경험은 있지만, 픽션이 아닌 사실을 바탕으로 써야 하기에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흐르지 않는다. 뼈를 깎는 고통 같은 건 모르겠는데 골치는 무진장 아프다.

온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몇 자 끄적이고 백스페이스를 누르고를 반복한다. 커서는 계속 제자리에서 맴돌고 있다. 그렇게 별 소득 없는 시간이 흐르고 일로나가 올 때가 다가온다. 처음에는 두 달이면 어느 정도 진도를 내지 않을까 싶기도 했고, 여름보다 가을이 좋을 것 같아서 내가 돌아온 후 두 달 뒤에 오라고 했었다. 무작정 오라고는 했는데 오면 또 어떡해야 할지 깝깝하다. 단순히 여행을 오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결심을 하고 오는 것이기 때문에 마음에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건 역시 모두 경제적인 부담이다. 지금 내 수중에는 여행을 완수하지 않아서 남은 몇 푼이 있을 뿐이다. 글쓰기는 뒷전으로 밀리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시작된다.

생전 이런 고민을 해봤어야지 원. 집은 어떻게 구해야 하는 건지, 대출은 어떤 식으로 받는 건지, 그걸 감당할 수는 있는지, 그리고 국제결혼 절차는 어떻게 되는지… 뭐가 그리 복잡한지 도통 윤곽을 잡기가 어렵다. 어쨌든 경제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게 현재까지의 결론이다. 가난한 사람은 국제결혼도 하기 어려운 시스템이다. 어느새 그렇게 피하고 외면했던 현실의 늪 위에 힘겹게 서 있는 꼴이 됐다. 사실 그 늪 위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다. 혼자였기에, 많은 짐을 버렸기에 그 늪 위를 걸을 수 있었을 뿐이다. 어깨에 짐을 하나 얻으니 발목이 늪에 잠긴다. 왜 세상이 늪지대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늪에서 사는 방법도 모르면서 같은 방식으로 살려고 한다면 결국 허우적거리다가 잠겨버릴 것이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러는 사이에 두 달이 훌쩍 지나고, 일로나가 도착한다. C 1-1반가운 포옹과 키스. 그래 내 선택은 틀리지 않은 거야. 앞날이야 어떻게 되든 우선 이 순간을 즐겨야겠다. 집이 좁아 친구네 집에 머물기로 하고 짐을 푼다. 밖에서나 안에서나 신세 지는 삶은 계속되고 있다. 새로운 여행을 하는 기분으로 서울 구경도 하고, 친구들도 만나고 가족도 만난다. 외국인이라는 어색함이 있지만 모두 반갑게 맞아주고, 일로나도 한국을 맘에 들어 한다. C 1-2C 1-3C 1-4C 1-5C 1-6C 1-7C 1-8C 1-9C 1-10C 1-12C 1-11

이미 내가 한 푼어치도 없는 가난뱅이라고 언질을 줬건만 서슴지 않고 이 먼 곳까지 찾아왔다면 이제 앞으로의 삶을 준비해야 한다. 돌아가면 언제 또 만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계속 머물 방법을 고민하던 끝에 어차피 한국에서 살려면 말을 배워야 하니 대학부설 어학당에 등록하고 학생비자를 받으러 일본으로 간다. 마침 무비자 한 달 기간이 끝날 시점이어서 어디든 나갔다 와야 한다. 학생비자도 대사관, 영사관마다 요구하는 서류가 달라서 여기저기 전화를 해보고 우리가 준비할 수 있는 서류만으로 비자를 받을 수 있는 고베 영사관에 가기로 하고 오사카행 비행기를 탄다. 새로 생긴 일본 저가 항공사 피치 항공으로 나름 저렴한 비행기를 끊을 수 있었다.

일본은 물가가, 특히 교통비가 굉장히 비싸서 여기저기 돌아다니기가 무섭다. 다행히 일로나도 나처럼 게으른 스타일의 여행을 즐기는 타입이라 좀 구경하다가 힘들면 공원에 앉아 노닥거리고, 햇빛이 좋으면 잔디밭에 누워 낮잠도 자고 하며 시간을 보낸다. 5박 6일간의 일정이었는데, 일본은 카우치서핑 반응이 영 신통치 않다. 이틀은 2평 남짓한 싸구려 비지니스 호텔에서 묶고 3일은 카우치서핑 친구 미주키를 만나 그 친구 집에서 지낸다. 미주키와 그녀의 친구들과 오사카 구경을 하고, 그녀의 가족과 교토 구경도 간다. 마지막 날에는 미주키가 아르바이트를 하는 이자카야에 가서 사케와 맛난 음식도 먹는다. 일본은 전반적으로 더치페이 문화지만 마지막 술자리는 미주키의 엄마가 대접을 해줬다. 고마운 사람들이 참 많다. 아무 탈 없이 학생비자를 받고 다시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C 1-13C 1-14C 1-16C 1-17C 1-18C 1-19C 1-21C 1-22C 1-23C 1-24C 1-25C 1-26

우리나라 사람들은 잘 느끼지 못하겠지만 우리나라는 저개발국 사람들에게 쉽게 비자를 내주지 않는다. 일로나가 세르비아의 한국 대사관에서 3개월 여행비자를 신청했지만 퇴짜를 맞은 경험이 있어서 고베에서 비자를 받을 때까지 계속 조마조마한 나날을 보냈다. 어쨌든 이제 6개월의 시간을 벌었고, 어학당을 계속 다니면 국내에서 비자를 연장할 수 있다. 서울 구경도 어느 정도 다 했고, 통장 잔액도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친구들이나 가족들이나 앞으로 어떻게 하려고 하냐 하는 말을 참고 있다. 사실 일로나를 불러들인 게 잘한 일인지 나도 잘 모르겠다. 어느 정도 준비를 하고 대책을 세운 후에 오게 하는 게 정답이겠지만, 현재 상황으로는 언제 그 준비가 될지 알 수가 없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 이 인연을 잃게 되는 건 아닌지 두려웠다. 그럼 모든 게 무의미해진다. 우선 목적을 취하고 수단을 찾은 수밖에 없다. 모든 게 쉽게 쉽게 풀리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언젠가 지금의 상황을 웃으며 얘기할 수 있는 날이 오리라 믿는다. 어떻게든 살아가는 게 인생이지 않은가.C 1-20

글을 다 써놓고 보니 우울한 얘기만 잔뜩 늘어놔버렸다. 워낙 낙천적인 놈이라 글의 분위기하고는 다른 생활을 하고 있다. 아무렴 짝이 옆에 있는데 우울할 틈이 있나.

Carpe Di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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