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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bia
Scott

5시부터 요상한 음악이 집안에 시끄럽게 울려 퍼진다. 베트남의 일반적인 기상시간. 올빼미 족인 우리에겐 안 좋은 시간대다. 계속 자고 있을 수 없어 일어난다. 아저씨는 모닝커피를 대접해 준다. C 20-1집안을 둘러보니 익숙한 얼굴이 큰 액자로 걸려있다. 베트남의 몇몇 가정을 들려본 결과 집안에 가족을 제외하고 액자로 걸려있는 인물은 딱 둘이다. 호치민과 장나라. 대단하다 장나라. 한류는 우리 생각보다 더 대단한 것 같다. C 20-2아저씨는 알아들을 수 없는 수다를 늘어놓으신 후 쌀국수를 대접해 준다. 이렇게 또 숙식을 대접받는다. C 20-3출발. 아침부터 햇살이 따갑다. 금새 살이 까맣게 탄다. 점심이 되자 가만히 쉬고 있는 와중에도 땀이 줄줄 흐른다. 30도가 넘는 날씨. 이제 밥값보다 음료수 값이 더 많이 든다. 이 와중에 베트남 여자들은 긴 옷에 모자를 눌러쓰고 얼굴을 다 덮는 마스크에 장갑까지 끼고 다닌다. 베트남에서는 흰 피부가 미의 기준이란다. 한 겨울에 미니 스커트를 입고 다니는 우리나라 여자를 보는 것 만큼 안쓰럽다. 미에 대한 욕망은 정말 놀랍다.

저녁쯤엔 ‘뀌년'을 지난다. C 20-4뀌년은 베트남 전 당시 한국군의 주된 활동무대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우리는 패전 군에 속해 있기 때문에 소문은 그리 좋지 못하다. 오래 전 친구 둘과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조사를 한 적이 있는데 당시 한국군은 극악무도하기로 악명이 높았다고 한다. 얼마나 잔인했는지 그렇게 저항이 강했던 베트꽁조차 한국군이 뜬다면 모두 도망갔다고 한다. 적군, 민간인 가리지 않고 학살을 감행했는데, 임신부의 배를 갈라 태아까지 꺼내 죽였다는 얘기도 있다. 오죽했으면 귀신도 도망갔다는 얘기까지 나올까. 지금 해병대의 위용을 자랑하는 ‘귀신 잡는 해병'이라는 말이 거기서 유래된 것으로 알고 있다. 부끄러운 일이다. 독일의 한 부대가 ‘유태인 잡는 나찌군'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한 기자 분이 그 진상을 조사해 알리려 하고 있지만, 당연하게도 정부와 해병 전우회에서는 그 사실을 극구 부인하고 있다. 내가 직접 조사한 게 아니기 때문에 정확한 진실 여부는 판단하기 쉽지 않으나 독하기로 소문난 우리나라 사람에 당시 반공 분위기까지 생각하면 허튼 소문만은 아닐 거란 생각이 든다. 전시라는 특수한 상황에 대해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그 문제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건 매우 조심스러운 일이다. 문제는 우리 정부가 그 소문이 사실인지 아닌지 밝히려는 자세가 없다는데 있다. 잘못이 있으면 바로잡고 사과해야 한다. 경제 발전을 위해 과거를 잊자는 베트남의 자세에 편입해 쉬쉬하면 우리나라는 성숙한 사회로 발전하지 못한다. 돈이면 다 되는 세상에서 그렇게 막강한 경제력을 갖고도 국제사회에서 큰 소리를 내지 못하는 일본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우린 다른 자세를 취해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해가 저물 때쯤 줄곧 나타나지 않았던 오르막이 등장한다. 한 고개만 넘으면 되리라는 예상과 달리 계속되는 오르막. 날이 어두워진다. 다행히 산 중턱에 화물차 기사를 대상으로 하는 작은 식당이 있어 멈춘다. 빈 터가 많아 밥을 먹고 텐트를 치면 되겠다. 밥값을 물으니 두 배 이상의 가격. 배도 그리 고프지 않고 해서 밥은 먹지 않고 텐트 칠 허락만 받는다.

씻고 식당에 앉아 있는데 식사를 하고 있던 운전사 아저씨들이 와서 같이 먹자고 한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식당 주인이 돈이 없어 밥을 못 먹고 있다 했나 보다. 좋아라 하면서 밥을 먹기 시작. 저렴한 걸 찾아 먹다 보니 일품요리만 먹게 돼서 이렇게 반찬을 놓고 먹는 밥이 맛있어 허겁지겁 많이도 먹는다. 우리가 느끼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막 먹었다. 밥을 다 먹으니 담배를 권한다. 다른 사람들 같지 않게 대화도 없다. 묵묵히 담배를 피고 일어나서 떠나려 한다. 그리곤 내일 일어나 밥 먹으라며 우리에게 4만 동을 주려 한다. 식당 주인에 말과 텐트와 까맣게 탄 우리 모습이 정말 불쌍해 보였나 보다. 염치라는 걸 잊은 지 오래지만 이건 정말 받을 수 없는 돈이다. 극구 사양을 하니 담배라도 가져가라 한다. 간신히 호의를 물리친다. 떠나가는 아저씨들에게 인사를 한다. 이곳에서 트럭 운전사 월급이 30만원이나 될지 모르겠다. 우린 수백 만원의 장비를 갖고 다닌다.

이공계의 기본이 수학이라면 그 반대편엔 경제학이 있다. 수학은 ‘두 점을 잇는 최단 거리를 선분이라 한다' 같은 기본 공리를 정하고 논리적으로 확장해 나가는 학문이다. 경제학의 기본공리는 ‘인간은 이기적이다' 이다. 선뜻 이해가 가지 않지만 그런 공리로 시작된 학문이 경제학이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것은 우리 삶에 아주 잘 적용되고 있다. 그리고 경제학에서는 ‘재화/욕망=행복’ 이라 정의한다. 그 결론은 인간의 욕망은 무한대이기 때문에 행복은 항상 ‘0’이다. 씁쓸하지만 그렇단다. 결국 행복이란 재화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다. 뻔하지만 그렇다.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