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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늦게까지 영화를 보고 자서 오늘도 늦게 일어난다. 사다 놓은 라면을 끓여 먹는다. Maggi라는 이름의 라면인데 두 개를 먹어도 양이 차지 않을 만큼 조그맣다. 국물에는 역시 커리맛이 난다. 커리 진짜 좋아하나 보다. 다행이 이 집에 고춧가루가 있어서 잔뜩 풀어 넣으면 그럭저럭 먹을만한 라면이 된다.

핫산이 놀러 온다. 얘도 할 일이 없는 모양이다. 몇 마디 나누다 보면 할 말이 없어진다. 핫산은 낮잠을 자고 난 받아놓은 소설을 읽는다. 책이 아닌 컴퓨터로 보니 그 맛이 떨어지지만 시간 보내기엔 좋다.

핫산과 함께 밥을 먹으러 간다. 로컬 레스토랑에서 닭고기 한 조각과 난 하나. 부족하다. C 6-3 밥을 먹고 나와 밖에서 담배 한 대피며 노닥인다. 핫산이 어딘가로 전화를 하더니 전화를 바꿔준다. 한국 삼촌이란다. 뭐 뻔한 인사치레 말을 주고 받는다. 아저씨는 핫산이 한국에서 일하고 싶어하는 것 같은데 자기가 영어를 못하니 그것에 대해 물어봐 달라고 한다. 아마도 일자리를 구해주고 싶으신가 보다. 핫산에게 말하니 워킹비자 받기가 힘들다며 비자를 받을 수 있으면 어떤 일이라도 한국에서 일하고 싶다고 한다. C 6-1하지만 핫산이 생각하는 어떤 일에 우리가 흔히 제 3세계 노동자들 생각하듯 3D업종이 포함돼 있는지 모르겠다. 이곳에서 중산층도 아닌 상류층 생활을 하다 그런 일을 하긴 힘들 것이다. 어쩌면 꿈에도 꾸지 않은 일일지 모른다. 한국 아저씨에게 넌즈시 핫산이 그렇게 어려운 살림은 아닌 것 같다고 하니 좀 의외라는 반응에 당황스러워졌다. 괜한 말을 한 건 아닌지 모르겠다.

이 둘의 관계는 핫산이 한국에 있을 때 그 아저씨가 다가와 말을 건 것에서 시작한다. 아저씨에겐 방글라데시 친구가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연락이 두절됐고, 우연치 않게 핫산이 그와 닮아 친근감을 표시했다. 그 전 친구와의 관계를 모르겠지만 핫산에게 용돈도 주고 밥도 사주며 친분이 생긴다. 핫산은 이유 없는 친절을 받고 우리나라를 좋아하게 된다. 그리고 그 호의를 지금 우리가 받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악덕기업주만 있는 건 아니라는 생각에 다행스런 마음이 들었다. 어째거나 그 문젠 10월에 한국에 놀러 간다는 핫산과 그 아저씨가 만나 해결할 일이다. C 6-2

좀 있으니 둘째 날 같이 했던 핫산의 삼촌이 온다. 이렇게 또 술자리가 마련된다. 집 근처에 있는 술집에 갔는데 이곳에서 술은 반 불법이라 그런지 술집에 불이 모두 꺼진 상태로 맥주를 마신다. 홀에 조그만 녹색 백열등이 하나 켜져 있고 그 마저도 잦은 정전으로 수시로 핸드폰 불로 자리를 밝혀야 하는 어둠의 공간에서 술을 마시니 적응이 안 된다. 삼촌의 술 권하는 솜씨는 예사롭지 않아서 금새 많은 맥주를 마시고 모두 취한다. 난 맥주가 맛없어 어둠을 이용해 조금씩 덜어냈기 때문에 취기가 덜하다. 영어를 잘 못하는 삼촌은 “I love you”를 연발하며 친근감을 표시한다. 가끔 손에 입맞춤을 하는데 짙은 수염의 감촉이 생소하다. 10년 넘게 수염을 유지하고 있는 나로서는 그 이질적인 느낌이 고려할 사항이 된다.

어쨌거나 또 잔뜩 취한 삼촌은 집에 가고 핫산을 남아 계속 술을 마시자 한다. 효일이도 어느덧 취함의 선을 넘을랑 말랑하는 눈빛이어서 그 둘을 보고 있는 게 그리 즐겁지만은 않다. 나 역시 술을 좋아하고 취하길 좋아하지만 정신이 있는 상태에서 술 취한 이들의 고집이라고 하기엔 부족한, 아집에 가까운 행동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저 한 숨만 나올 뿐이다. 절제는 어느 상황에서나 중요한 덕목이다.

집으로 돌아온다. 너무 취해 늘어지는 건 원치 않지만 이런 자리가 술을 먹어서가 아닌 생소한 술집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처럼 여행을 좀 더 의미 있게 만든다는 것에 대해 부인할 순 없다. 한 순간이라도 더 이들과 어울리는 건 내가 생각하는 여행에 있어서 바람직한 일이라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