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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S#14. Epilogue: 향수병

2010. 10. 6. 04:15 | Posted by inu1ina2

다카에서 핫산의 삼촌과 취하도록 술을 마신 날 어느 정도 취기가 오른 효일이가 물었다.

“형. 지금 여행이 즐거워?”

‘심각한 대화를 펼쳐보잔 얘기군. 하긴 그 동안 우린 별 대화를 하지 않았으니 그럴 때도 됐지.’ 라고 생각하며 대답을 했다.

“즐거운진 모르겠어. 즐거움은 너무 작고 일시적인 감정인 것 같아. 자전거 타는 거? 힘들어 전혀 즐겁지 않아. 길거리에 텐트치고 자는 거? 찝찝하고 불편해. 돈 아끼느라 먹고 싶은 거 못 먹는 것도 전혀 즐겁지 않아. 즐겁다고 말하진 못하겠는데 난 지금 이 여행이 좋아. 돈이 많아서 좋은 리조트 옮겨 다니며 쉬는 여행도 난 좋아. 적당한 예산으로 비행기, 버스 타며 배낭 짊어지고 하는 여행도 좋아. 그리고 많은 사람들과 살 부대끼며 지낼 수 있는 이 여행도 좋아. 난 그냥 여행이라는 게 좋아.”
“뭐가 좋은데?”
“뭐가 좋은진 몰라 그냥 좋아. 여행을 떠나기 전 한국에 있을 때, 한국에 있는 나와 여행하고 있는 나를 생각하면 후자가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리고 여행을 하고 있는 지금 한국에서 또 그런 그런 생활을 하고 있는 나와 여행을 하고 있는 나를 생각하면 역시 후자가 좋아. 그러니 지금이 나에겐 좋은 순간이겠지 뭐.”
“난 모르겠어. 뭐가 옳은지, 왜 이 여행을 하고 있는지, 어느 순간 이 여행을 포기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우리가 뭐 엄청난 대의를 품고 옳기 위해 이 여행을 떠난 건가? 포기라는 단어를 쓸 만큼 대단한 목적을 위해 떠난 여행은 아닌 것 같아. 그냥 여행이 지겨우면 돌아가는 거지 포기라고 말할 필욘 없지 않나?”
“형은 이 여행을 포기하지 않을 것 같아?”
“몰라. 모든 게 지겨워지고 사람들이 그리워서 죽을 지경이 되면 돌아가겠지. 근데 돈이 다 떨어지거나 부상을 당하거나 하는 것처럼 물리적으로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되지 않는 한 이 여행을 끝낼 것 같진 않아.”
“왜 여행을 하는 거야?”
“여행이 좋으니까 하는 거지 뭐 다른 이유가 있을라고. 그래도 이 여행은 내게 큰 결심을 요구하긴 했어. 년 단위의 시간이 필요한 일은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떠나느냐 마느냐. 난 선택에 기로에 섰을 때 항상 염두에 두는 게 있어. 과연 지금 어떤 선택을 해야 수 년 혹은 수십 년 후에 그 때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까? 그 기로에서 난 여행을 떠나는 게 후회하지 않을 선택이라고 판단한 거지. 뭐가 성공인지 모르겠지만 그 선택에 성공과 실패의 요소는 전혀 고려치 않아. 오직 후회의 감정만 고려하지. 그럼 내 삶을 돌아봤을 때 적어도 후회스러운 인생은 아니었구나 싶을 테니까.”
“그럼 후회한 적이 없어?”
“그럴 리가. 작게는 여러 번 있을 테고, 크게는 두 번이 있지. 그 두 번은 너도 익히 알고 있는 거고. 그냥 후회스럽지 않은 삶을 위한 처세의 한 방편일 뿐이야.”
“……”
“……”
“모르겠어. 난 지금 지독한 향수병에 걸린 것 같아.”

며칠 전부터 옛 여자친구와 친구들의 사진들을 들춰보고 있더니 그들이 그리워졌나 보다. 하긴 나 또한 취한 채로 새벽에 친구를 깨워 전화를 하며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으니까.

“난 지금 1년이 너무 길게 느껴져. 근데 어제 친구와 메신져를 하는데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하더라고.”
“넌 군대를 안 갔다 와서 그 감정을 이제 느끼는 것뿐이야. 오랜만에 즐거운 마음으로 휴가를 나가면 놈들은 “또 나왔냐” 라고 하거든 나 또한 다른 군바리에게 그랬고. 지금 우리의 시간과 친구들의 시간은 다르게 움직이니까 그건 섭섭해 할 필요도 없어.”
“태국에서도 그랬지만 말레이시아에서 너무 오래 머물면서 이렇게 된 것 같아. 일주일만 한 곳에 머물러도 모든 게 지겨워져.”
“그래. 항상 새로운 자극이 넘쳐나는 생활 속에서 정체된 일주일은 충분히 여행의 회의를 만들 만큼 긴 시간이지. 나도 마찬가지야.”
“지금은 여행을 왜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 답을 찾기 위해서라도 여행을 그만둘 것 같진 않아.”
“그러도록 하여라. 니가 돌아가면 난 너무 심심해지니까. 심심한 건 딱 질색이야.” Epilogue 2어느덧 여행 떠난 지 일년이 다 돼가고 있다. 누군가는 ‘돌아가지 않는 것이 진정한 여행’이라 했고, 누군가는 ‘돌아갈 곳이 있으니 여행이다’ 라고 했다. 나에게 이 여행은 무엇일까? 이 여행의 답을 찾는 건 삶의 답을 찾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솔직히 말하면 여행에서 무언가를 얻고자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여행은 여행일 뿐이지 거기에 뭔가 대단한 게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누군가 여행에서 무언가를 찾았다면 그건 삶 속에서 찾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이 여행 속에 있다면 난 그걸 찾고 싶다. 이 여행의 부제인 ‘What are we running for?”는 그 이유에서 지어진 제목이다.

향수병은 전염성이 강하다. 동반자의 향수병은 나에게도 쉽게 옮겨진다. 가족과 친구들 모두가 그립다. 한국에 돌아가 그들을 만나면 꽉 안아주고 싶다. 그들을 보면 눈물이 흐를지도 모른다. 나 좋다고 떠난 여행인데 힘든 여행 한다고 쌈짓돈을 보내주거나, 필요한 게 있으면 부탁하라고 당부하는 그들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난 이 여행을 통해서 간접적인 방법으로나마 처음으로 엄마에게 ‘사랑한다’ 말했다. 친구에게 ‘그립다’고 말했다. 바보같이…

지금까지 여행을 통해 무엇을 찾았냐고, 무엇을 얻었냐고 묻는다면 난 ‘아무것도 없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애초에 그런 게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한가지는 확실히 알았다. 그건 새로 발견한 것도 내가 모르고 있던 것도 아니다. 언제나 있어서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나에게 통풍보다 무서운 향수병을 안겨주는 이들에 대한 사랑. 그들의 사랑. 내 짝만 찾으면 내게 더 필요한 건 없다.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걸 재확인했으니 이제 난 부담 없이 여행이나 즐기면 되지 않을까…

Epilogue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