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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 사람들은 무척이나 부지런해서 5시면 벌써 부산한 움직임 소리가 들린다. 어느새 아이들이 몰려들어 잠에서 깬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밤새 비가 와서 텐트와 매트리스를 말리려고 널어 놓고 아침을 먹는다. C 9-1 라면이 어제만큼 맛있지가 않다. 어제는 허기에 맛있었던 같다. 짐을 정리하고 출발한다.

이제부터 여행 중 길이 남을 최악의 하루가 펼쳐진다. 우리가 달리고 있는 길은 ‘순코시’라는 강을 따라 나 있는 길이다. C 9-2강변길이라 하면 강 수면 10~20m 높이에 쭉 이어진 경치 좋은 길을 연상하겠지만 전혀 아니올시다. 강이라기 보다 계곡이란 표현이 더 정확하다. 그 계곡을 이루는 주변 산을 큰 칼로 툭툭 쳐낸듯한 길은 산 능선을 따라 구불구불 이어져있는데 단 10m도 평지 없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길이다. C 9-3황토 흙 길은 물기를 잔뜩 먹어 질퍽하고, 사방에 돌멩이가 굴러다닌다. C 9-12체중을 다 실어도 나가지 않는 경사 길은 10m마다 한 번씩 쉬어가며 자전거를 끌고 올라야 한다. C 9-10그런 경사의 내리막길 또한 신중할 필요가 있다. 당연히 가이드레일은 없고 큰 돌멩이에 걸려 바퀴가 삐끗하기라도 한다면 그대로 굴러 떨어질지도 모른다. 얼마나 많이 멈추고, 얼마나 많이 턱까지 차오른 숨을 골랐는지 모르겠다. 단 한 시간 반 동안 이동한 길에서 지옥을 보았다.

뒤쳐져오고 있는 효일이를 기다리고 있는데 딱 자전거 실기 좋은 트럭이 한 대 지나간다. C 9-11필사적으로 차를 잡아 세운다. 천만다행으로 차에 자전거를 싣는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이곳을 수십 번 왕래했을 운전사의 질주가 시작된다. 덜컹거리며 달리는 차 위에서 60kg에 다다르는 자전거를 지탱하기가 만만치 않다. 자전거 위에 올라 오토바이 자세를 하고 다리로 균형을 잡고 팔로 트럭 기둥을 잡고 버틴다. 한번 쿵쾅거릴 때마다 쓰러지려 하는 자전거를 지탱하느라 여기저기 부딪힌다. 그리고 곧 장대비가 쏟아진다. 그러나 단 1초도 비를 피해야겠다는 생각을 할 수 없을 만큼 들썩이는 자전거 지탱에 온 힘을 쏟는다. 차는 18km를 달리고 멈춘다. 아저씨는 이제부터 좋은 길이라 알려주고 옆 공사장으로 들어간다.

근처 가게 앞에 자전거를 세우고 정신을 가다듬는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팔에 경련이 인다. 힘들 길을 달릴 때마다 더 힘든 상황을 상상하며 위안 삼는다. 지금 지나온 길에서 차를 못 얻어 탔다면, 펑크라도 났다면 얼마나 더 짜증났을까… 하지만 이런 상상이 위안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지금의 상황을 더 진저리 나게 만들 만큼 힘든 길이었다.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 효일이의 앞 짐받이가 부러졌다. C 9-4말레이시아, 싱가포르에서도 못 구한 앞 짐받이다. 네팔에 있길 기대할 수 없다. 우선 철사로 임시방편 한다. 차 한잔과 과자부스러길 먹으며 휴식을 취한 후 다시 출발한다.C 9-5

앞으로 좋은 길이라 했던 길은 아스팔트 반, 자갈길 반이다. 하지만 경사각이 아주 낮다. C 9-6그래 이걸로 충분해. 지금 포장, 비포장을 가릴 때가 아니다. 숨 헐떡이지 않고 자전거 페달을 밟을 수 있는 길이면 족하다. 한 타임을 달린 후 쉬고 있는데 또 비가 쏟아진다. 한 시간을 넘게 기다려도 그칠 생각을 안 한다. C 9-7적당히 빗줄기가 줄어들 때쯤 다시 출발하지만 10분이 안 돼 빗줄기가 굵어진다. 산 동네를 달리고 있기 때문에 마을을 한 번 벗어나면 다음 마을까지 거리가 꽤 될 뿐만 아니라 네팔 집은 처마가 없거나 너무 짧아서 비를 피할 수 없다. 이미 몸은 젖을 때로 젖어서 모든 걸 포기하고 앞으로 나간다. 물은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속성이 있어서 모든 걸 포기하고 비를 흠뻑 맞으면 오히려 기분이 상쾌해지는 느낌을 누구나 경험해본 적이 있겠지만 그것도 집에 돌아가면 포송포송한 잠자리가 보장돼 있을 때의 얘기다.

날이 저물 무렵 한 가게 앞에 멈춘다. 옷을 짜내고 따뜻한 자 한 잔 먹는다. 오늘은 어디서 자야 할지 막막하다. 숙소는 보이지도 않을뿐더러 비가 계속 오고 있어서 텐트 칠 곳도 찾기 힘들다. 가게 의자에 앉아 멍 때리고 있는데 동네 사람들이 한두 명 구경 온다. 한참 후 나타난 한 아저씨. 오늘의 구세주 나셨다. 근처 학교 선생님이라는데 잘 때가 없으면 자기 집에 가서 자 잔다. 언제 어느 때고 이런 분들이 나타난다. 근데 아저씨가 술 한 두잔 하더니 취기가 도는지 한 시간 동안 움직일 생각을 안하고 같은 질문과 얘기를 반복한다. 영어가 짧아 물어볼 말이 한정돼 있는데다 취기까지 섞여 그 정도가 심해 슬슬 짜증이 나려고 한다. 그렇다고 내가 손을 놓을 수 있는 입장도 아니고, 악의가 있어서 그러는 것도 아니니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이다.

자전거는 길가 가게 안에 넣어놓고, 선생님의 집으로 올라간다. 산 길을 달리며 저런 데서 어떻게 사나 싶은 높은 지대에 있는 집이다. 집에 들어가 술을 더 하며 또 같은 얘길 반복한다. 축축한 옷이 찝찝하고 춥다. 그렇게 그렇게 시간은 흘러 11시 가까이 돼서야 우리가 잘 방이 공개된다. 잠이야 아무데서나 자도 되지만 씻는 게 문제다. 산 높은 곳에 위치한 집이라 물이 귀하다. 샤워는 고사하고 하루 종일 비에 젖은 머리도 감지 못한다. 비와 땀이 범벅 된 옷에서는 쉰내가 난다. 여분의 옷은 비에 다 젖은 상태고 마른 옷은 저 아래 자전거 짐을 다 풀어헤쳐야 나온다. 그래 잠자리를 구한 게 어디냐 이걸로 만족하다. C 9-8여행 중 맞닥뜨리게 되는 짜증스럽고, 찝찝하고, 고된 상황이 하루에 다 벌어진 기가 막힌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