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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동네 사람들은 역시 일찍 일어난다. C 10-1무리한 주행 후에 나타나는 근육통증과 피로감, 발바닥 까짐 증상이 고스라니 나타난다. 어제의 여파가 아직도 남아있다. 집에는 동네 분 몇 분이 놀러 오셨다. 한 수다쟁이 아저씨는 오늘은 자기집에서 자자하면서 집에 가면 버팔로(물소를 그렇게 말한다) 한 마리 잡아 먹자 한다. 집이 어디냐 물었더니 반대편 산꼭대기를 가리키신다. 언제 여기까지 오셨대… 내가 여기서 살면 귀찮고 힘들어서 아무데도 안 갈 것 같다. 우리를 재워준 람고팔 아저씨는 학교구경하고, 동네 구경하면서 오래 머무르라고 한다. 평상시 같으면 길 위에서 만나는 이런 만남이 즐거워 하루 정도 더 머물렀겠지만 몸도 힘들고, 씻지도 못해 찝찝함이 말이 아니라 하루라도 빨리 카트만두에 도착하고 싶을 뿐이다. 아쉽지만 거절을 하고, 차려준 밥을 먹는다. C 10-3

산동네 네팔 전통 가옥은 벽돌이 아닌 흙으로 지어진 집이다. 바닥도 딱딱한 흙 바닥이다. 요리를 하는 작은 아궁이도 흙으로 만들어져 바닥과 연결돼있고, 굴뚝도 마찬가지다. 모든 게 일체형이다. 큰 딸이 해준 밥을 먹고 산 아래로 내려온다. C 10-2오늘도 날씨가 흐리다. 차 한 잔 먹고 출발한다.

오르막이 이어지지만 경사가 가파르지 않고, 무엇보다 아스팔트길이라 느리지만 불평 없이 달린다. C 10-5고도가 높아지면서 산 아래 전경이 눈에 들어온다. 산 허리에 걸쳐진 구름과 듬성듬성 있는 집들이 마치 산수화에 나오는 그럼처럼 멋지다. C 10-4그러나 구름이 많아 언제 비가 올지 모르는 상황이다. 1,500m 고지에 올랐을 때쯤 조금씩 비가 내린다. 100m 정도 내리막을 달리자 빗 줄기가 굵어진다. 가게에 멈춰 차 한 잔하며 한 시간을 기다리니 비가 멈춘다. 출발할 때 남은 거리가 60km 정도여서 잘하면 오늘 카트만두에 도착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비 때문에 시간을 너무 빼앗긴다. 다시 한 시간을 달려 ‘디누켈’이라는 큰 도시를 지나는데 비가 또 내리고 앞 바퀴에 펑크가 난다. 펑크를 떼우고 기다려도 비는 멈추지 않는다. C 10-7 30km 정도 남은 상황. 해가 지려면 세시간 정도 남았으니 평상시 같으면 비를 맞으며 달리겠지만 남은 30km가 세 시간이 될지 다섯 시간이 될지 가늠이 안되니 섣불리 결정할 수가 없다. 여전히 쉰내 나는 옷은 비에 젖은 상태고 고도가 높아져서 날씨도 춥다. 비 쫄딱 맞고도 도착하지 못하면 감기 걸리 딱 좋은 상태다.

일몰 시간 한 시간 반을 남겨놓고 비가 그친다. 아직 희망을 접지 않고 힘차게 페달을 밟지만 1km를 못 가 또 비가 쏟아진다. 30분을 기다리니 다시 비가 멈춰 달리지만 역시 1km를 못 가 또 비가 온다. 짜증이 장난 아니다. 결국 모든 희망을 접고 근처 가게에 자전거를 대고 휴식을 취한다. 비는 그칠 생각을 안하고 팔에는 소름이 돋을 만큼 춥다. 곧 날이 어두워진다. 감기에 걸릴 가능성이 너무 커서 오늘은 텐트 치기를 포기하고 근처에 숙소를 잡기로 한다. 지나가는 한 친구에게 근처에 싼 숙소를 물어보니 일행 중 한 아저씨가 “어디가?” 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일을 한 분이라 어설프게 우리말을 하면서 가게 주인이 더 잘한다고 한다. 가게 아저씨는 우리가 중국 사람인 줄 알고 말을 안 걸었다고 한다. 네팔에서는 모두 우리보고 중국사람이냐 묻는다. 인접국가라 그런가 보다. 가게 아저씨에게 싼 숙소를 물으니 여기저기 전화를 하는 것 같더니 자기집은 어떠냐 한다. 마다할 이유가 눈곱만큼도 없다.

8시에 가게 문을 닫고 2층으로 올라간다. 5년간 한국에서 일을 하고 7년 전에 돌아오셨다 하는 아저씨의 이름은 ‘브리티비'다. C 10-6친 동생분은 한국 여자와 결혼해 한국에서 산다고 한다. 딱 사람 좋게 생긴 아저씨는 맛있는 밥을 대접하고 자기 침대를 내주신다. 밥을 먹고 방에서 직접 담은 술이라며 한 잔 권한다. 그 동안 먹은 네팔술은 그다지 독하지 않아서 방심하고 있었다. 목이 확 달아오르는 첫 느낌. ‘락시'라는 술인데 술을 손가락에 찍어 라이터를 켜면 바로 불이 붙는다. 알콜도수 100%라 한다. 세상에 100% 술도 있구나. 잔 위에 눈을 대면 눈이 따갑고 점성이 강하다. 아저씨는 3년 전에 아내를 잃어 자기 전에 한잔씩 먹는 술이란다. 한국에서 힘든 일하며 돈 모아 지은 3층 건물에 가게를 내고 이제야 가족들이 모여 행복하게 살 환경이 됐는데 아내를 잃었으니 그 마음이 오죽할까. 그 때문에 다시 한국에 가고 싶지 않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대한 원망은 아니다. 그랬다면 우리를 맞이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어설프게나마 우리말을 하시니 이런 저런 애기도 하고 좋다. 확실히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다.

온수까지는 아니지만 미지근한 물에 샤워를 하고, 아들 옷까지 내주시니 카트만두에 도착해서 기대했던 상황을 이렇게 맞이하게 됐다. 삶의 우연성이란 가히 놀랍다는 생각이 든다. 비가 내린 시간, 비가 그친 시간, 달리길 포기한 순간, 숙소를 묻기 위해 선택한 사람, 그 일행 중에 한국에서 일한 아저씨… 모든 것이 가늘게 이어져 아저씨를 만나는 행운을 얻은 것이다. 어쩌면 다른 어딘가에서도 누군가를 만나 그 만남을 우연의 놀라움으로 표현할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타지에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과의 만남은 다른 우연보다 더 특별하다. 카트만두에 도착하고자 했던 바람은 깨졌지만 당장의 목적이 아닌 여행의 목적을 생각하면 더 값진 하루가 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