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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끈적거리는 찝찝함, 추위, 전날의 낮잠 때문에 곤히 잠에 빠져들지 못한다. 뒤척거리다 그냥 일어나 앉는다. 종점이 다가오니 많은 사람들이 빠져나가 기차 안은 휑하다. 자는 둥 마는 둥 꾸벅거리고 있는 중에 잠무에 도착한다.

내리자마자 짐칸으로 간다. 주위를 둘러봐도 자전거가 없다. 뭐야 이거… 반대편 짐칸으로, 역시 없다. Luggage Office로 가서 영수증을 내민다. “I don’t know.” 뭐야 모르면 어떡하라고… 짐 운반과 관련된 모든 사람에게 영수증을 내밀어도 다 나 몰라라. 짜증지수 급 상승. 모든 짐과 자전거가 없다. 환전해 온 달러도 모두 그 짐에 있다. 내가 들고 있는 건 랩탑, 여권, 배터리 다 된 캠코더와 카메라, 아이팟, GPS. 제일 높아 보이는 사람에게 묻는다. 내일 다시 와 보라는 말 뿐이다. 절망.

기차역을 나온다. 연락해 둔 카우치서핑 친구네 집은 5km 떨어져 있다. 릭샤왈라들이 달라붙지만 일단 걷는다. 흥정할 기분도 아닐뿐더러 이런 복잡한 상황에선 좀 걸으며 생각을 정리해야 한다. 지금 나에게 무슨 선택의 여지가 있을까? 내일 다시 와 본다. 수자이에게 전화를 걸어 뿌나역에 가서 그 짐의 행방을 알아봐 달라 부탁한다. 우선은 그게 다다. 짐을 사라진 경우. 남은 돈으로 되는대로 여행을 계속한다. 다시 뿌나로 내려가 따지고 안될 경우 뭄바이로 넘어가 여행을 쫑 낸다. 인도 정말 욕 나온다. 그렇게 상황을 정리하고 땀 흘리며 카우치서핑 친구네 도착한다. C 12-1C 12-2

정원이 딸린 좋은 집이다. 일 보는 친구가 내가 묶을 방을 안내하고 집 주인인 수디르 아저씨를 부른다. 처마 밑에 앉아 절망적인 상황에 넋을 놓고 있는 중에 수디르 아저씨가 온다. 근처에 회사가 있는 모양이다. 점심 시간에 짬을 내 왔다. 상황을 설명해주자 안타까워하며 우선 자기는 일하러 가야 한다고 좀 있다 사람을 보낼 테니 같이 역에 가서 알아보라 한다. 일하는 친구 라훌이 차려준 점심을 먹고 샤워를 한다. C 12-3짐이 없으니 뭐 할 것도 없어 우쿨렐레나 튕기며 맘을 다스린다. 잠시 후 군인 둘이 짚차를 타고 온다. 노련한 중대장처럼 보이는 아저씨와 원숙한 행정보급관처럼 보이는 아저씨는 라이플까지 어깨에 메고 왔다. 수디르 아저씨 뭐 하는 사람인 거야… 짚차를 타고 기차역으로 간다. 공권력이 적이 되면 굉장히 골치 아픈 일이지만, 내 편이 되면 맘이 든든하다. 왠지 뭔가 해결될 것 같은 느낌이다. 거친 운전 솜씨가 오히려 든든한 이 기분.

기차역에 가서 노련한 중대장 필 아저씨가 내 영수증을 내밀고 뭐라 하는데 분위기는 화물 담당자 아저씨가 서열이 더 높은 듯 싶다. 무슨 얘긴진 잘 모르겠지만 미루어 짐작컨데 수디르 아저씨 손님이니 잘 알아봐 달라.. 뭐 그런 느낌이다. 하지만 도착하지 않은 짐이 나타날 리는 없고 다음 기차는 내일 온다. 내일 와 보라는 같은 얘길 듣고 나온다. 집에 돌아와 좀 있으니 수디르 아저씨가 와서 영수증을 보여 달라더니 어딘가에 전화를 건다. 친구가 뭄바이 기차역의 관리란다. 힘 꽤나 쓰는 아저씨인가보다. 잠시 후 그 친구의 전화가 오고 그 짐은 하루 늦게 붙여 내일 도착할 거라 한다. 내일이 돼 봐야 알겠지만 우선 마음이 놓인다. 수디르 아저씨는 다시 일하러 나가고 난 긴장이 풀려 잠시 눈을 붙인다.

수디르 아저씨가 퇴근을 한다. 술 한 잔 하겠냐고 해서 오케이 하고 나간다. 그 노련한 중대장 틱한 아저씨는 수디르 아저씨의 개인 운전사였다. 근처에 가서 럼주와 저녁거릴 사온다. 술을 한 잔하며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눈다. 수디르 아저씨는 회계 관련한 공무원인 듯 하다. 한 해 500억 달러 정도를 다룬다고 하니 군인들을 사사로이 운용할 직위다. 굉장히 친절하게 편의를 봐줘서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다.

한참 술이 오르는데 왠지 모를 느낌이 온다. 아저씨는 눈빛에 예사롭지 않은 감정이 실려있다. 은근 슬쩍 떠본다.

“좋은 직업도 있고, 사람도 좋은데 왜 결혼 안 하고 혼자 살아요?”
“음… 나 여자를 좋아하지 않아.”

빙고. 그런 느낌이 있었다. 태국에서 만났던 폼도 그렇고 게이에게서 풍겨 나오는 남다른 느낌이 있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방식이 좀 더 공손하고 여성스럽다. 그리고 그게 상대방을 굉장히 편하게 한다. 게이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원래 그런 것인지 아니면 사회의 터부 속에서 그렇게 자신을 순응자의 모습으로 어필하기 위해 변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게이는 편하다. 단 두 번의 경험으로 일반화 할 순 없겠지만 말이다.

오랜만에 독한 술을 마셨더니 알딸딸하니 좋다. 더불어 그 동안 정신 없어 느끼지 못했던 외로움이 몰려온다. 어쩌면 외로움이란 삶의 여유에서 오는 사치스런 감정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이 어디에서 사치를 부릴 것인가. 삶의 순간 순간 찾아오는 그런 감정을 일에 치여 접어두고 삶아야 한다면 그것만큼 불행한 일도 없다. 외롭고 슬픈 마음에 가슴이 찡해졌지만 한편으론 온전히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있어 다행이다. 그래서 이 고된 여행을 멈추지 못하는 것이겠지. 내일 무사히 짐이 도착해야 할 텐데… 아직 끝낼 수 없는 여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