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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늦게까지 푹 자고 일어난다. 에싼이 갖다 준 아침상을 받고 론리플레닛을 보며 쉬라즈 구경 동선을 짠다. 여기저기 포인트가 많아 에싼에게 물어 추천코스를 받아 GPS에 체크한다. 자전거를 타고 나온다. 동네 구경할 때는 여유롭게 걷는 게 편한데, 집이 외곽이고 휴일에는 버스가 잘 안 다닌다고 한다. 다행히 날씨는 우리나라 한 여름 정도니 이 정도면 자전거 타고 다니기 충분하다. 휴일이어서 그런지 거의 모든 가게가 문을 닫았다. 얘넨 상점도 같이 쉬는 구나.

처음 들른 곳은 누구 무덤인데 별로 볼 건 없다.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유적도 그냥 평범하다. 현지인의 추천코스가 이 정도면 쉬라즈도 그 명성이 과장돼 있는 듯 하다. 그래도 비수기라 유명한 유적지를 한가롭게 둘러볼 수 있어서 나름 나쁘진 않았다. 이란은 정원 문화가 발달했는지 유적지마다 잘 가꿔진 정원이 있어 혼자 둘러보면 여유롭고 좋다. 한 박물관에서 일본 여자처럼 보이는 애 둘이 흘끔흘끔 쳐다보길래 한국인이라고 말해준다. 너무 비수기라 한국사람은 고사하고 다른 외국인도 보기 힘들어 일본 사람도 반가워서 말을 더 걸어보려다가 여자애들이 못 생겨서 만다. 뭐 걔들도 관심 없었을 테고...

마지막으로 들른 어느 모스크는 카메라를 못 들고 들어가게 해서 빈손으로 들어갔는데 그나마 제일 볼만했다. 이쪽 건축물에서 볼 수 있는 화려한 타일 장식을 모두 색색의 거울로 꾸며놓은 내부가 그럴싸했다. 유적 보는 걸 즐기는 사람이라면 기억에 남을만하지 않을까 싶다. 유명한 시장이 있어 둘러보려 했지만 모두 문을 닫아 겉만 돌고 만다. 혹자는 시장을 가야 그들의 삶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다고 하지만 난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처음 보는 신기한 물건에 가끔 마음을 뺏길 뿐 시장을 어디나 다 비슷하다. 현지인의 삶을 엿보려면 그곳을 잘 아는 현지인을 만나 그들만 가는 가장 평범한 곳을 방문하는 게 최고다.

쉬라즈 구경을 마치고 천천히 페달을 밟으며 집으로 향한다. 사건은 거기서 시작한다. 한적하고 넓은 길인데 오토바이 하나가 뒤에서 끼어든다. 살짝 부딪혀 자전거가 기우뚱하는 순간 누군가 크로스로 메고 있던 가방을 끌어당긴다. '뭐야'하며 뒤를 돌아보는데 벌써 그 질긴 가방 끈은 칼로 잘려 그 놈들 손으로 넘어가고 있다. 뺏기지 않으려고 허우적거려보지만 칼을 휘두르고 있어서 가방을 놓치고 만다. 차라리 걷고 있는 중이었으면 다른 행동을 취할 수 있었을 텐데, 자전거 위에서 달리고 있던 중이라 발길질도 못하고 뭘 할 수가 없다. 자전거를 세우고 내리려는 순간 오토바이는 저만큼 내뺀다. 다시 페달을 힘껏 밟아보지만 오토바이를 따라잡을 순 없다. 100m 정도 쫓아가지만 그 놈들은 방향을 바꿔 시야에서 사라진다. 이 모든 게 10초안에 일어났다. 경찰서로 가느냐 집으로 가느냐. 근처에 있던 상점 아저씨에게 경찰서를 물어보지만 이란 사람들 영어 못한다. 집으로 돌아온다.

집에 오니 에싼은 어디 갔는지 없다. 핸드폰은 가방 속에 있다. 별수없이 문 앞에서 기다린다. 담배한대 피고 싶은데 담배도 돈도 없다. 뭘 잃어버린 건가 생각해본다. 캠코더, 카메라, 아이팟, 핸드폰, 9만원 상당의 이란 돈과 현금카드가 있는 지갑, 잡다한 자료가 들어있는 USB 메모리, 노트 하나, 펜 두 개, 그 동안 만난 몇 몇 여행자들의 명함, 중국에서부터 고이 간직하고 있던 콘돔, 그리고 여권... 젠장! 보통 여권은 잘 안 가지고 다니는데 이란엔 검문이 많아 갖고 있었다. 이 여행은 이렇게 끝나는 건가? 그렇잖아도 부족한 경빈데 캠코더와 카메라를 새로 사면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여기서 여권 재발급은 되는 건지... 골치 아프다.

오른쪽 어깨가 쑤셔 옷을 까보니 10cm 정도 칼에 베인 상처가 있다. 베었다기보다 긁혔다. 피가 흐를 정도는 아니고 맺힌 정도다. 그 놈들도 해치려는 의도보다는 위협하는 선에서 휘두른 것 같다. 내가 손과 발이 자유로워 더 집요하게 달려들었다면 심각한 상처를 남겼을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 앞으로의 계획을 짜는 동안 세 시간이 흐른다. 옆집에 있던 애들이 나와 사정을 말하고 에싼에게 전화 좀 달라하니 우선 집으로 들어오란다. 에싼의 친구들이었다. 그 친구의 차를 타고 근처 경찰서로 간다. 경찰은 사건 지역 관할경찰서로 가란다. 그 와중에도 한국인이라고 하니 '주몽' 얘기를 꺼낸다. 에이씨 나 그 드라마 안 봤어!

가방을 뺏긴 지점을 GPS에 체크해 뒀다. GPS는 자전거에 달려 있어서 살아남았다. 그곳에 가서 경찰을 부르고 대충의 경위를 설명한 다음 경찰서로 간다. 그 사이에 에싼이 온다. 이 친구들이 있었기 망정이지 이란 경찰들 영어 하나도 못한다. 조서 꾸미는데 무슨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는지 여러 경찰을 거쳐 싸인만 5번 정도 하고 두 시간 만에 서류 하나가 나온다. 그리곤 이곳은 지역 경찰서니 그 서류를 들고 더 큰 경찰서로 가야 한단다. 친구들의 차를 타고 이동. 또 다른 경찰서에 도착했는데 여긴 무슨 일이 있는지 문밖으로 핏물이 흘러나오고 있다. 조심스레 문을 열어보니 한 경찰 팔에서 피가 흐르고 있고 맞은 편에 한 남자가 쓰러져있다. 피가 낭자한 상태로 죽어있는 사람 처음 본다. 상황이 이러니 한 여행자가 날치기 당한 사건은 안중에도 들어오지 않는다. 내 어깨의 상처는 보여주기도 부끄럽다. 시간도 늦어서 내일 다시 오기로 하고 경찰서를 나온다.

내가 불쌍했는지 친구들이  근사한 식당에 데리고 간다. 외국인이 들어오자 여기 저기서 쳐다본다. 이란 여자는 차도르만 뒤집어 썼지 굉장히 적극적이다. 먼저 헬로를 외치는 건 모두 여자들이다. 남자랑 같이 있어도 여자가 어느 나라 사람이냐 묻는다. 그럼 방긋 웃어주며 한국에서 왔다고 말해준다. 언젠가 말했지만 정보가 부족할 수록 상상력이 커진다. 차도르를 뒤집어 쓰고 있는 이란 여자는 그 동안 여행했던 여느 나라 여자들 보다 예쁘다. 아무리 여권을 잃어 버렸다 해도 예쁜 여자가 묻는데 어느 남자가 미소 짓지 않을 소냐. 그런 게 인생인걸.

친구들이 시켜준 진수성찬에 바보같이 카메라를 찾는다. 어디다 뒀지? 크건 작건 옆에 있어야 할 게 없을 때, 그것을 망각하고 있다 어느 순간 그 부재를 깨달았을 때 사람은 서글퍼지는 법이다. 하지만 내 식욕은 어떤 감정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 아무리 서글퍼도 맛있는 건 맛있는 거다. 배불리 잘 먹는다.

집에 돌아와 한국 대사관에 전화해 보지만 업무시간이 아니어서 한국 직원이 없다. 24시간 어느 곳에서도 된다고 홍보하는 영사콜 센터는 잘못된 번호라고만 나온다. 친구들이 열심히 도와주고 있지만 앞으로의 계획은 벌써 머릿속에 그려졌다. 여권을 찾을 방법은 없다. 아쉽지만 에스파한 구경은 못할 것이고 경찰서에서 확인서를 받은 후 한국대사관이 있는 테헤란으로 버스를 타고 간다. 여권 재발급이 안되면 임시 여행확인증을 받고 한국으로 돌아가면서 이 대장정은 끝이 날 것이고, 여권 재발급이 되면 캠코더와 카메라를 새로 사고, 터키를 지나 동유럽 어딘가에서 끝나게 되겠지.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남겨두지만, 지나가고 돌이킬 수 없는 일에는 미련을 두지 않는 성격이다. 칼이 가방 끈을 자른 순간 이 사건은 끝이었다. 언젠가 한 번은 일어날 일이라 각오하고 있던 일이다. 그게 지금인들 무슨 상관이랴. 언제 또 여권을 도둑맞아 볼 것인가. 좋은 일이던 나쁜 일이던 새로운 경험은 소중하다. 니체가 말하지 않았던가. '나를 죽이지 않는 모든 것은 나를 강하게 만든다'.

샤워 물에 어깨가 쓰라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