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Plan Korea
Columbia
Scott

모함마드 친구의 전화를 받고 깬다. 문을 따주고 옷을 챙겨 입는다. 밖에 나갈 땐 긴 바지를 입어야 해서 귀찮다. 빨간 헐렁 바지를 입으니 그건 좀 그렇다는 반응. 다른 바지를 보여주니 괜찮다고 했다가 미군 바지라 하니까 절대 안 된다고 손사래를 친다. 결국 모함마드의 면바질 하나 꺼내 입는다.

마르지는 모함마드의 대학교 후배다. 32살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 사람은 어디 가나 어려 보이는 축이라 누나 같다. 이란 사람은 기본적으로 우리보다 5~10살은 더 들어 보이고 여자 쪽은 더 한 것 같다. 그래도 비슷한 연배라 공감대가 있다.

우선 전자제품 상점이 많은 지역으로 간다. 건물 하나와 그 주변에 상점이 늘어서 있다. 근데 대부분 핸드폰이고, 카메라는 조금, 캠코더를 더 조금이다. 카달로그도 없고 매장끼리 연락해서 물건을 조달하는 용산과 달리 전시된 모델이 아니면 그냥 없다고 해 버린다. 그래서 아예 캐논 대리점에 간다. 쓰던 모델이 꽤 오래된 모델인데도 전시돼 있길래 가격을 묻는다. 현재 우리나라 인터넷 최저가가 60만원이 안되고 중고로 35만원에 샀었는데 1,200,000토만을 부른다. 미친 거 아냐? 두 배 가격이다. 전자제품에 세금이 많이 붙는다던데 큰 맘을 먹어도 살수 있는 가격이 아니다. 바로 포기한다.

어디 가고 싶냐 물어서 테헤란에 뭐 있는지 모른다고 하니 고민을 하다 근처에 있는 박물관에 간다. 처음엔 작은 박물관 그리고 국립 박물관에 간다. 이란의 역사는 우리나라보다도 더 오래됐기 때문에 국립 박물관치고는 규모가 작아도 전시물은 다양하다. 박물관 구경을 그리 즐기지 않지만 500토만 밖에 안 하니 할 일 없을 때, 지나는 길에 들려 볼만하다. 어느 나라 사람이든 자기 나라의 박물관은 잘 가지 않는 듯 같이 온 마르지도 신기해하며 본다. 현지인이라고 굳이 가이드가 되어 마냥 설명하려 들지 않고, 같이 여행하는 친구마냥 유물이 아닌 재미있는 소품을 보듯이 "이거 웃기게 생겼어. 이건 뭐지?" 하며 오히려 나에게 묻는 게 맘에 든다. 영화 '300'에서 변태스런 왕으로 묘사됐지만 실은 페르시아 제국의 가장 위대한 왕이었던 크세르크세스(파르시 발음은 완전히 달라서 금방 까먹었다)의 유물을 보며 영화 얘기가 시작 됐는데 영화를 꽤나 즐기는 친구인 것 같다.

박물관에서 나와 근처에 있던 식당에 들어간다. 벽에는 몇몇 작가와 많은 영화 감독의 사진이 걸려있다. 한 명 한 명 누군지 알아 맞히기 놀이를 한다. 스콜세지, 올리버 스톤, 히치콕, 트뤼포, 베케트, 까뮈, 구로자와... 루이스 브뉘엘까지 알고 있어서 깜짝 놀란다. 그의 영화를 본 사람은 더러 있어도 얼굴까지 아는 사람은 물어본 적은 없지만 한 명도 못 봤다. 놀이에 탄력 받아서 식사중인 다른 테이블 앞에까지 가서 액자를 가리키며 웃고 떠든다. 나는 앙드레 말로를, 마르지아는 파졸리니를 못 맞혀 승부를 내지 못하고 게임은 끝난다. 마침 웨이터가 터투로를 닮아서 "쟤 존 터투로 닮았지?" 하고 또 한참을 웃는다. "왜 걔 무슨 무슨 영화에 나온 애 있잖아."라고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 자신이 관심 있어하는 분야의 특정 지식을 배경으로 일상적인 대화를 하듯 농담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상대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즐거운 일은 없다. 그 상대가 여자라면 곱하기 알파다. 남자와 여자는 사고체계가 달라서 관심사가 다를 수밖에 없다. 35년 동안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여자는 많지 않았다. 거의 없었다고 하는 게 맞겠다. 그런데 이란에서 이런 자리가 만들어질 줄이야. 기분도 좋고, 택시비와 박물관 요금을 먼저 계산해줘서 밥값은 내가 낸다 한다. 36,000토만. 아~씨 졸라 비싸. 일주일 치 생활비다. 평범한 레스토랑이고, 평범한 식사였는데... 수도라 물가가 좀 되나 보다. 업 됐던 기분은 약간 다운. 물건을 도난 당하지 않아서 큰 돈이 나갈 상황이 아니었으면 손 좀 떨렸을 거다.

또 어디 가나 하는데 마르지가 아쉬운지 카메라를 좀 더 알아보자 한다. 밑져야 본전이니 다시 가 본다. 캠코더는 포기하고 카메라를 알아본다. 카메라는 우리나라보다 20~30% 정도 더 비싸다. 이거라도 사야 하나. 몇몇 똑딱이는 Full HD 동영상도 지원하니 터키에서 친구를 만날 때까지 이걸로 동영상을 찍으며 버텨도 될법하다. 매장을 돌며 가능한 디카의 가격을 묻는다. 운 좋게도 생각했던 후지 카메라 하나가 우리나라보다 싸다. 신기하게 딱 그것만 싸다. 물론 새 걸로 사야 하니 부담되긴 한다. 집에 가서 캠팩트 카메라의 동영상 샘플을 좀 봐야겠다.

매장을 나와 길을 걸으며 노닥거린다.
"차도르 안 불편해?"
"불편하지. 벗어버리고 싶어."
"궁금한 게 있는데... 이란 여자들도 해변에 갈 거 아니야. 거기선 어떡해?"
"이란 바다 별로 안 좋아. 유명한 데가 하나 있는데 가로막 쳐놓고 남자 여자 따로 놀아."
"웃기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답변이야."
"그러게 말이야."
한 옷 가게 상점 쇼윈도가 보인다.
"마네킹도 차도르를 하고 있잖아?"
"그래도 요즘은 나아진 거야. 원래 규정대로 하려면 이렇게 해야 해."
스카프를 딱 얼굴만 보이게 감싼다.
"머리카락도 보이면 안돼."
"그러게 밤에선 여자들이 다 검은 옷을 입고 그렇게 두르고 다니더라. 무섭더라고."
"지방에선 아직 그러지."
"불공평한 거 아니야. 여자들이 저항을 해야지."
"맞아. 더 웃긴 건 이란에선 여자들이 축구 보러 경기장에 가면 안돼."
"뭐야 그건 또."
"3년 전인가? 50명이 단합해서 국가대표 경기 보러 갔다가 체포된 적이 있어. 몇 시간 만에 풀려나긴 했지만 상황이 그래."
가판대 신문에 후진따오가 보인다.
"저기 악수하고 있는 사람 니네 대통령이야?"
"어. 총으로 쏴버리고 싶은 멍청한 대통령."
"그건 우리나라도 그래."

웅장한 뮤직홀처럼 생긴 극장 주변 벤치에 앉는다. 언제나 이렇게 늘어져 사람 구경하는 게 제일 재미있다. 음악얘기를 나누다 마르지가 이란 전통 음악이라며 MP3를 꺼내 이어폰 한쪽을 내게 건넨다. 여자친구가 아닌 여자와 이어폰을 나눠 끼고 음악을 들었던 적이 있었던가? 그런 생각을 하며 서너 곡의 노래를 더 듣고 동네로 돌아온다.

집에서 고기나 볶아먹을 요량으로 정육점에 가자 한다. 소고기를 사려다 혹시나 해서 소뼈도 파나 물어보니 이란에서도 특별한 날엔 사골국을 먹는다고 한다. 팔뚝만한 소뼈와 소고기 반근 정도를 사고 배추가 보여 내친김에 두 포기와 고춧가루, 마늘, 양파 등을 산다.

집에 와서 마르지에게 감사의 표시로 기념품을 주고 바이바이.
"인터넷 검색 좀 해보고 적당한 거 있으면 카메라 사러 가야 하는데, 시간되면 같이 가주지 않으련?"
"파트타임 일을 하고 있어서 4일은 일을 해야 하는데 언제 쉴지 모르겠네. 쉬게 되면 연락할게."

난 샤워를 하고 인터넷을 연결한다. 사골국물 우려내는 방법과 젓갈 없이 김치 담그는 법을 찾는다. 둘 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다. 우선 배추를 절이고 그 사이 뼈의 핏기를 빼고 불에 얹는다. 김치 양념을 만든다. 뭐가 있어야지 마늘을 다지지. 비닐 봉지에 넣고 일일이 손으로 으깨는데 시간이 오래 걸려 그 사이에 배추가 절여진다. 우리나라 배추와 얼갈이 중간 정도되는 배추라 너무 풀이 죽었다. 양념과 버무린다. 맛을 본다. "아따 맛대가리 없어라." 뭔가 부족한 맛인데 그게 한두 개가 아닌 듯. 그래도 재료도 부족한 상태에서 처음치고는 적당하다. 인도에서 먹은 김치보단 훨씬 낫다. 푹 익혀 찌개 끓여먹어도 되고... 뼈는 언제 다 고아지려나.

졸라 오랜만에 데이트도 하고, 김치도 만들고... 보람찬 하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