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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편안한 침대에서 푹 잤다. 주방에서 뚝딱거리는 소리가 들려 가보니 세르잔이 뭔가 대단한 요리를 준비하는 듯하다. 요리하는 거 좋아한단다. 잠시 후 다른 색의 눈동자를 가진 세르잔의 친구가 온다. 그 친구도 같이 요리를 한다. 라쟈냐와 돌마가 완성되고 세르잔이 만든 칵테일과 함께 먹는다. C 68-1대낮부터 술이다. 한참을 노닥거리다가 둘이 좀 진지한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아서 빠져준다.

저녁에 친구가 가고 우리 둘이 남은 맥주를 한 잔 또 한다. C 68-2세르잔이 갑자기 이 동네 카우치서핑 친구들에게 벙개 문자를 돌린다. 버스를 타고 시내에 가서 한 펍에서 그 친구들을 만난다. 그리 재미있진 않다. C 68-3

번개모임은 간단히 끝나고 둘이 터키 전통 스타일의 카페에 가서 차를 마시며 나르길래(‘나이길래’가 아니라 ‘나르길래’였다)를 핀다. C 68-4세르잔은 캄보디아에서 만났던 세바스티안과 성격이 비슷해서 얘기도 잘 들어주고 조잘조잘 잘도 떠든다. 처음 만났지만 오랜 친구처럼 편한 스타일이다. 나르길래를 다 피고 집에 돌아온다. C 68-5

집에 돌아왔을 때쯤 세르잔은 좀 취해있다. 나는 술을 먹을라치면 끝까지 먹는 스타일이라 그런 분위기가 없는 이곳에선 처음부터 자제를 해서 멀쩡하다. 세르잔은 흥이 붙었는지 집에 있는 술을 꺼내기 시작한다. 집에는 보드카, 데킬라, 바카디, 맥주, 와인 등 많은 술이 구비돼있다. 세르잔은 자리에 앉지 않고 계속 음악을 틀며 혼자 흥에 겨워 술을 마신다. 이런 분위기라면 먹을만하다 싶어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술을 먹기 시작한다. 같이 음악에 몸을 흔들며 떠들면서 분위기가 무르익는다.

한참 술을 마시다가 대단한 걸 보여주겠다는 듯이 맥주에 데킬라를 따른 잔을 떨어뜨린다. 이걸 뭐라 하는가. 바로 폭탄주.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폭탄주라는 의미를 잘못 알고 있어서 맥주에 데킬라잔을 넣으면 술잔이 부글부글 끓어오를 줄 알았는지 아무런 변화가 없는 술잔에 실망하는 눈치다. 실소하며 폭탄주를 한 모금 먹더니 얼굴을 찌푸린다. 외국인에게 폭탄주 만들어주면 한방에 간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진짜 못 먹는다. 내가 원샷의 비우니 놀라워한다. 이 사람아 내가 바로 폭탄주의 고향에서 온 사람이라고… 곧 맥주잔 대신 세르잔의 위가 부글부글 끓어올라 오바이트를 하면서도 투지를 발휘하며 계속 술을 마신다. 남자 둘뿐이지만 술을 마시며 음악에 몸을 흔들며 즐겁다. 작은 주방이 웬만한 클럽보다 더 흥겨운 곳이 됐다. C 68-6

갑자기 깨달은 건 우리나라 사람이 남의 눈을 많이 의식하는 것도 있지만, 상에 앉아 술을 먹다 보니 일어선 사람을 바라보기가 불편하고 그 자세에서 술에 취하면 늘어지거나 진지한 분위기로 흐르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자세의 문제. 탁자에 앉아있으면 일어나기 쉬워 누군가가 개의치 않고 일어서 몸을 흔드니 나도 자연스럽게 일어서게 되고 몸을 흔들며 술을 마시니 한결 즐겁다. 남자 둘이 술을 마셔도 이렇게 흥겨울 수 있구나. 널리 퍼트릴 일이다. 난 다시는 상다리에 앉아 술을 먹지 않으리란 결심을 하게 될 정도다. 즐거움이라는 게 얼마나 작은 변화에 달려있는 것인지 깨닫는 순간이다. 얼마나 많은 것을 아무런 생각 없이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걸까? 생각해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