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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bia
Scott

숙취가 조금 있다. 발코니에 나가 담배를 한 대 핀다. 4개월전 비슷한 상황에서 갑자기 뜨끈한 해장국이 먹고 싶어져 한국 행을 결심했었다. 해장국이 그립긴 마찬가지지만 그때는 날이 찌뿌둥했고, 오늘은 따사로운 햇살이 비친다. 날씨 따위가 사람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는구나. 따끈한 차를 한잔 마시고 속을 푼다. 햇살은 따스해도 바람은 쌀쌀하다. 밤에 텐트치고 자는 건 무리라는 생각이 들어 하루 안에 달릴 수 있는 거리마다 촘촘히 카우치서핑 메세지를 보낸다.

친구들도 헤롱헤롱. 저녁까지 늘어져 있다가 축구를 보러 나선다. 오늘은 터키의 엘 클라시코라 불리는 갈라타사라이와 페네르바체의 경기가 있는 날이다. 친구들은 모두 갈라타사라이의 팬이다. 집에서 20분 정도를 걸어 조그만 카페에 도착한다. 경기 시작 한 시간 전이지만 벌써부터 사람이 많이 몰려있다. 프로젝터가 설치된 작은 카페엔 의자가 빼곡하게 놓여있다. 자리를 잡는다. 술을 마시는 것도 아니고 차를 마시는 것도 아니고 그저 축구를 보기 위해 모여든 열혈 축구광들이다. 경기가 시작될 쯤 카페가 사람들로 꽉 메워지자 주인장이 돈을 걷는다. 뭘 파는 장사를 하는 게 아니라 5리라(약 3,100원)씩 입장료를 받는다. 족히 2~3백 명은 모인듯하니 꽤 쏠쏠한 장사다.

경기가 시작하고 응원이 시작된다. C 2-2그 작은 공간에서 양 팬들이 적절히 섞여 환호와 야유를 번갈아 보낸다. 플레이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하며 목청을 높이는 모습이 재미있다. 15분만에 페네르바체가 두 골을 터뜨리며 기세를 올린다. 35분쯤 갈라타사라이가 한 골을 만회하면서 자못 시시해 질뻔한 경기가 달아오르며 전반전이 끝난다. 골이 나오면 카페는 축구라는 종교에 빠진 광신도들의 환호로 들썩인다. 나도 축구를 좋아하지만 여기선 명함도 못 내밀겠다. 예전에 본 한 아르헨티나 영화가 떠오른다. 행방이 묘연한 범인 때문에 골머리를 썩던 경찰이 범인이 축구광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는 이런 말을 한다. “사내는 뭐든 바꿀 수 있어. 얼굴, 집, 가족, 여자친구, 종교, 신. 하지만 못 바꾸는 게 딱 하나 있어. 이건 못 바꿔. 자신의 열정!” 그리곤 범인이 좋아하는 팀의 경기장에서 범인을 잡는다. 또 시오노 나나미였든가 무라카미 류 였던가.. 그 둘 중 하나는 이탈리아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이탈리아 사람은 축구를 좋아하지 않는다. 이탈리아 사람에게 축구는 삶 그 자체다.” 이곳의 풍경도 그와 다를 바 없어 보인다.

후반전이 시작하고 갈라타사라이가 동점을 만들면서 결과를 예측할 수 없게 되자 위험한 플레이 하나하나에 아주 난리가 난다. 경기는 결국 무승부로 끝이 난다. 난 이네들의 모습이 축구보다 더 재미있었다. 결과에 아쉬워하며 카페를 우르르 나가는 남자들에게서 묘한 기운이 느껴졌다. C 2-1아닌 게 아니라 터키에서 여러 친구들이 모이면 굉장히 남성적인 에너지를 느끼게 된다. 오랜 옛날 이런 애들이 말 타고 우르르 돌격해오면 정말 무서웠을 것 같단 상상을 하곤 했다. 재미있는 건 이런 비슷한 기운을 몽골에서도 느꼈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육식을 즐겨 했던 유목민 시절 갖고 있던, 흡사 육식 동물의 살기(?)같은 그런 기운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실제로 오래 전 몽골 사람은 마치 육식동물 마냥 한번에 폭식을 하면 며칠 동안 먹지 않고도 잘 버텨서 원정 전쟁에 유리했다고 한다. 음식이 사람을 충분히 바꿀 수 있기에 오랫동안 전해 내려온 유목민의 유전자와 막 축구라는 전쟁을 끝내고 집으로 향하는 이들에게서 평소보다 더한 야성의 기운이 풍겨져 나왔을 수도 있다.

어쨌던 재미있는 구경을 하고 집에 돌아온다. 하루 종일 먹은 것도 별로 없는데 신기하게도 배가 그리 고프지 않다. 한국에서 정말 엄청 먹었었는데, 이상하게도 다시 나오기만 하면 위가 알아서 움츠러드는지 밥 달라 요구를 않는다. 이것 또한 나의 육식성이 갖는 한 면모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