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타즈마할의 전신이 되는 후마윤의 묘를 구경가려 했었는데, 어제 피로가 남아있어 귀찮고 시간도 많고 해서 다음으로 미룬다.
계란 장조림과 후라이, 감자볶음 그리고 어빈이 만든 스프로 밥을 먹는다. 구식 경양식 집에서 돈까스 먹기 전에 나오는 걸쭉한 스프가 내가 경험한 첫 스프이기 때문에 나에게 스프란 허여멀건 한, 있으니 먹는 의미 없는 음식일 뿐인데, 어빈이 만든 스프는 유럽 시골마을 농가 벽난로에서 큰 쇠단지에 끓여 퍼주는, 영화 속에서나 봤던 그런 스프다. 맛도 왠지 영화를 보며 그럴 거야 싶은 맛이 난다. 제대로 된 건 다 맛있다.
배부르게 밥을 먹고 어빈이 담배 피러 가자 해서 나간다. 집 안에서 담배를 필 수 없어 필 때마다 같이 나가는데, 이번엔 아무렇지도 않게 마리화나를 꺼낸다. 뒤늦게 생각해보니 오늘은 'smoke'가 아닌 'some smoke'하러 가자 라고 했던 것 같다. 마리화나를 말면서 맛은 별론데 품질은 좋다고 한다. 내가 그 맛을 알리 없지만 대낮에 식후땡으로 너무 당연한 듯 한 모금 빨고 권해서 나도 당연한 듯 받는다. 마리화나라는 것이 우리나라에선, 적어도 내가 살고 있는 환경에선 구경조차 힘든 거라 괜한 호기심이 발동하고 그에 대한 금기 때문에 마리화나를 돌리는 무리에 섞여있을 때는 뭘 해도 자세 안 나오는 이등병처럼 보일 까봐 애써 태연한 듯 행동하게 된다. 막 상경한 시골처녀가 보따리 꼭 끌어안고 눈으로만 힐끗 거리는 모습이랄까? 어쨌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위험할수록 스릴이 있기 마련이다. 그게 불법이라면 더 그렇다 라고 무너진 쌍둥이 빌딩 꼭대기에서 줄타기를 했던 곡예사가 말했다. 사실 이런 경험은 두어 번 있었는데 맛이 좀 다를 뿐 담배와의 차이를 모르겠어서 이젠 별로 흥미가 없다.
다시 방으로 들어와 다운 받아놨던 텍스트 파일로 된 소설을 읽는다. 아이패드다 뭐다 해서 곧 책이 사라질 거라는 예견들이 나오고 있다. CD가 MP3로 넘어갈 때는 너무 자연스럽게, 필름 카메라가 디지털 카메라로 넘어갈 때는 잠깐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을 뿐이지만, 책이 사라진다는 건 쉽게 용납되지 않는다. 뒤집어 까져서 책을 보다 베고 자기도 하고, 급할 땐 라면 냄비 받침도 사용할 수 있는 책이 사라진다는 건 서글픈 일이다. 세상의 변화는 빠르니 생각보다 더 빨리 e-book의 세상이 될지도 모른다. 여행을 하다 보면 정말 느려터진 곳이 많은데, 시계가 움직이는 속도는 저마다 다른 듯 하다.
계속 소설을 읽고 있는데 갑자기 머리가 핑 돌면서 글자 하나가 눈 앞까지 튀어 나왔다 들어간다. 그리고 모든 글자의 폰트 크기가 비정상적으로 커져서 이상해하고 있다가 집중을 하니 원래 상태로 돌아왔다. 아! 이런 거군. 품질이 좋은 거라 하더니 효과가 나타났나 보다. 신기하다. 여행하면서 마리화나 삐끼들을 수도 없이 많이 만났다. 하지만 우리가 그 유혹에 넘어갈 일은 없다. 우리는 환각보다 허기와 갈증 같은 가장 기본적인 본능을 충족시키는데 혈안이 돼 있으니 말이다.
저녁에 어빈이 짐을 챙긴다. 오늘 암리챠르로 간단다. 헝가리오면 호스트 해 주겠다고 해서 연락처를 주고 받는다. 인사를 하고 어빈이 떠난다. 좀 시니컬하지만 괜찮은 놈이었다. 우리가 온 후 두 팀이 왔다 가고 다시 이 집엔 우리만 남았다. 비행기 날짜도 기다려야 하고 한국에서 받을 물건도 있어서 일주일을 더 머물러야 한다. 아직은 전혀 눈치를 주고 있지 않아서 맘이 불편하진 않다. 이 상태를 유지하려면 한국요리 저녁상이 한 번 더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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