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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bia
Scott

예기치 않은 사건이라기보다 기대한 상황들이 전혀 벌어지지 않아 짜증이 많았던 인도에서 결국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게 되는 결정을 내리게 됐다. 물론 이유는 많다. 캠코더를 도둑맞아서, 경비가 부족해져서, 파키스탄 비자를 받기 위해 등등… 핑곗거리는 많고, 그런 이유 때문에 결정한 일이지만 솔직히 말하면 적잖이 한심스러운 결정이었다. 그 방법밖에 떠오르지 않았고 나름 최선의 결정이었으나 왠지 아무도 관심 없을 변명을 늘어놔야 할 것 같은 부끄러움이 있다. 여행의 고수가 돼보겠다는 생각도 없었고, 이 여행의 완수에 대한 사명감 따위는 여전히 없다. 단지 작정했던 일을 이렇게 우회하게 되는 상황이 실망스러울 뿐이다.Epilogue 1

돌이켜보면 어린 시설부터 그런 성향이 몸에 배 있었다. 누군가에 의해 주어진 일은 끝까지 해내야 직성이 풀리는데, 유독 스스로 결심한 일에 대해선 언제나 그럴싸한 핑계를 만들어 끝까지 완수해내지 못함을 합리화했다. 그래서 이번 여행을 떠나기 전에 5년짜리 장기 여행이라고, 다시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떠들고 다녔었다. 그렇게 나 스스로 파놓은 구멍에라도 들어가야 빠져나오기 위해 발버둥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귀국한 지 열흘이 된 지금 내가 던진 출사표를 꺼내 들며 나를 나무라는 사람은 없다. 나무라기는커녕 그저 반갑게 맞이해 줄 뿐이다. 14개월로도 나의 의지가 충분히 반영된 것인지, 아니면 내가 그들에게 그 정도의 인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게 주변의 눈치를 살펴보지만 사실 정확히 따지고 들자면 이런 고민은 이도 저도 아닌 나 자신의 문제일 뿐이지 남들이 개입할 여지가 없는 부분이다. 애초에 그들은 내가 만든 허상의 책임감이었을 뿐이니까. Epilogue 2일이 틀어졌을 때 책임감이 없는 사람은 도망치고, 부족한 사람은 변명하고, 강한 사람은 용서를 구하고 대가를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런 경우 즉 자신과의 약속에 대한 책임은 도망치거나 변명할 수는 있어도 용서를 구할 수는 없다. 책임을 지운 사람과 책임을 진 사람이 같아서 용서한다는 것 자체가 변명이 된다. 그렇기에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라는 각오가 여기저기서 남발되고 있나 보다. 뭘 그렇게 자신과 싸워대는지 모르겠지만 나 또한 그러했으니 누굴 타박할 자격은 없다.

이번에 느낀 패배감의 유일한 원인은 현대사회의 미덕인 쓸데없는 목표의식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나의 삶의 기조는 개인의 노동 착취를 조장하는 사회에 따르지 않는 한결같은 한량의 자세인데, 자유롭게 놀아보고자 떠난 여행에서 뭔가 이루어보고자 하는 욕심을 부렸다. 여행 떠난 지 일 년이 넘어가면서 괜히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힘든 코스를 순조롭게 지나치면서 세상에 대한 겸허함을 잃어버린 것이다. 욕심은 화를 부르기 마련이다. 결국, 내가 얻은 건 그렇게 좋아한 여행지였던 인도에 대한 악의에 찬 감정뿐이다. 여행을 하다 보면 굉장히 작은 것에 감정이 움직이고, 생각이 많아진다. 그렇기에 기본 전제를 어떻게 가져가느냐에 따라 여행에 대한 감상이 천지차이로 달라질 수 있다. 이제 나에겐 초보자의 순수함은 없다. 그 대신 그 순수함이 어떤 과정으로 변질되는지는 잘 알게 됐다. Epilogue 3

여행이 하는 자에게는 현실인 걸 알면서도 난 다시 여행의 낭만을 꿈꾸고 있다. 그런 순수함. 그걸 유지하는 게 다음 여행의 과제가 될 듯하다. 여행이 주는 설렘은 언제나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