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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28. Singapore (2023. 07.27 ~ 07.30)

2023. 9. 9. 23:09 | Posted by inu1ina2

올여름 여행지는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다. 둘 다 와 본 곳이고 여행지로서 크게 흥미로운 지역이 아니어서 망설였지만, 일로나가 싱가포르에 가보고 싶어 해서 그냥 가기로 했다. 싱가포르도 뉴욕이나 파리, 도쿄같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도시여서 어떤지 확인해 보고 싶었나 보다. 다만 싱가포르만 보기엔 거기까지 간 게 아까워 말레이시아를 추가했다.

밤 비행기를 타고 새벽에 쿠알라룸푸르를 거쳐 오전에 싱가포르 공항에 도착한다.

잠을 잘 자지 못해 온몸이 뻐근하다. 공항에서 바로 호텔로 가려다 유명하다는 창이공항의 원형폭포를 보러 간다. 숲속 한가운데서 쏟아지는 성스러운 물줄기가 연상되는 풍경이다.

규모가 커서 위아래로 자리를 옮겨 가며 시점을 달리해 보고 싶었지만, 지쳐있는 아이들을 데리고 여기저기 둘러보기가 힘들다. 그냥 한 곳에서 사진 몇 방 찍고 돌아 나온다. 창이공항에서 출국하는 경우에 여유 있게 도착해 둘러보는 편이 좋을 것 같다.

MRT를 타고 호텔로 가 짐을 풀고 바로 수영장으로 간다. 낮잠으로 여독을 좀 풀어낸 후 여행을 시작하려 했지만, 피곤해하면서도 수영장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는 아이들의 성화를 이겨낼 수가 없다. 우선 호텔 앞에 유명하다는 식당 '잠잠'이 있어 그곳의 주메뉴인 무르타박과 미고랭을 포장해 와 호텔 방바닥에 앉아 끼니를 때운다.

싱가포르 물가가 비싸다곤 하지만 30만 원 가까이하는 호텔에 테이블도 하나 없다니. 유명세가 자자한 무르타박도 그리 맛있다고 할만한 음식은 아니었다. 근처에 있으면 한번 맛이나 볼 수준이다. 배를 채우고 수영장으로 간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여행에선 수영장이 필수다. 사실 아이들은 어떤 나라든 상관없다. 그들의 관심은 그저 물놀이일 뿐... 수영장 물이 찼지만, 아이들은 신경 쓰지 않는다. 피곤한 상태에서 몸을 달달 떠는 걸 보니 감기에 걸릴까 싶어 잠깐 맛만 보고 방으로 돌아온다.

두어 시간 늘어진 후 밖으로 나온다. 호텔 근처에 술탄 마스지드와 하지레인이라는 유명한 거리가 있어 가본다.

하지만 술탄 마스지드는 관광객 출입 시간이 끝났고, 하지레인은 술 먹기에 좋은 곳이라 아이들과 함께 즐기기엔 적합하지 않다.

그저 색색의 이국적인 건물 구경만 좀 하고 저녁을 먹으러 간다.

시내 중심지라 그런지 밥값이 사악하다. 물가 비싼 나라는 싫다. 그렇지 않아도 걷기 싫어하는 아이들이 여독까지 쌓여 그냥 길바닥에 주저앉으려 하는 걸 간신히 달래 밥만 먹고 호텔로 돌아온다.

다음날, 시간에 맞춰 조식 뷔페를 먹으러 간다. 형편없다. 고기라곤 치킨 너겟뿐이다. 그 흔한 베이컨도 없는 뷔페라니... 적당히 끼니만 때우고 오늘의 일정을 시작한다.

MRT를 타고,

셔틀버스를 타고 싱가포르 동물원에 도착한다.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규모라는 이곳의 동물원은 마치 정글 속에 들어온 듯한 느낌을 준다.

동물의 종류와 개체 수는 여타 다른 동물원과 큰 차이가 없는데 규모가 크다 보니 우리도 더 크고 동물들도 더 자유로워 보인다.

그래 봐야 갇혀 있는 동물이라는 건 변함없지만 우리나라 동물원의 동물보다는 삶의 질이 좋을 것이 분명하다.

정글 속을 슬슬 걸으며 신기한 동물 구경하는 게 나름 흡족하지만, 더운 날씨에 큰 동물원을 둘러보는 게 아이들에겐 버거워 보인다.

동물원의 하이라이트 격인 동물들만 섭렵하고 택시를 타고 호텔로 돌아온다.

비싼 물가에 한 푼이라도 아껴보고자 동물원에 갈 때는 대중교통을 이용했지만, 전체적인 물가에 비해 택시비는 좀 싼 편이라 우리 넷의 대중교통비와 오가는 수고를 생각하면 택시가 더 이익이다.

호텔 근처 터키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다.

간단한 식사 메뉴를 시켰지만, 영수증엔 고급스러운 정찬 가격이 적혀있는 이 놀라운 현상.  

뭐 맛있게 먹었으면 됐다.

아이들의 성화에 못 이겨 수영장에서 휴식.

몸을 식힌 후 그 유명한 가든스 더 베이로 간다. 역시 사악한 가격인 플라워 돔과 클라우드 포레스트에 갈까 말까 망설였지만, 또 여기까지 와서 랜드마크를 지나치는 것도 아닌 것 같아서 그냥 들어간다. 그런데 싱가포르 정도 되는 나라가 왜 내국인과 외국인의 입장료에 구분을 두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먼저 들어간 플라워 돔은 예상대로 이런 식물원에 왜 그런 입장료를 부과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이다.

이게 거대한 돔이라는 상징성이 없다면, 식물에 대해 특별한 조예가 없다면 올 필요가 있을까 싶다. 바깥과 다르게 시원하다는 것만 위로가 된다.

플라워 돔에 실망한 후 들어간 클라우드 포레스트는 시작부터 기대감을 불러일으키는 첫인상을 보여준다.

마침 아바타 전시가 진행 중인데 이곳의 분위기와 아바타 속 나비 행성의 분위기가 자못 흡사하다.

아이들은 영화 속 캐릭터 조형물에 시선을 뺏겨 불평이 사라졌다.

아바타와의 조합이 너무 좋아서 이 전시가 끝났을 때 이곳의 분위기가 어떨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클라우드 포레스트는 나름 볼만하다.

양 돔 구경을 마치고 수퍼트리 라이트쇼를 보러 간다.

45분이 남은 시각인데도 사람들이 좋은 자리를 다 차지하고 있다. 우리도 한쪽 구석에 자리 잡고 쇼가 시작되길 기다린다.

날이 어두워지고 하나둘 조명이 켜진다. 745분이 되자 쇼의 시작을 알리는 음성과 함께 음악이 울린다.

처음에 사진 몇 방 박고 아이들과 드러누워 쇼를 감상한다.

내 이놈의 카메라를 어떻게 하든지 해야지.... 가만히 바라보면 이렇게 좋은 걸 매번 사진 찍느라 제대로 구경도 못 하고...

그래도 또 찍어놓은 사진과 비디오로 그때의 기억을 되살리니 이게 참 딜레마다. 어쨌든 수퍼트리 라이트쇼는 조명 연출이 좀 아쉬웠지만 거대한 규모가 주는 웅장함은 충분히 즐길 만했다.

이튿날 역시 형편없는 조식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오늘 오전 코스는 보타닉 가든. 혼자 하는 여행이라면 절대 오지 않았을 곳이지만 아내가 원하고 아이들과 산책하긴 좋을 것 같다.

공원은 입구부터 그 울창함을 드러낸다.

한국 사람으로서는 공원이라기보다 숲에 가까운 느낌이다. 아마도 아열대 기후라서 가능한 풍경이리라.

그런 아열대숲의 분위기가 뭔가 이국적이고 신비스럽게 느껴진다. 중간중간 거대한 도마뱀도 기어다니고,

그 숲 사잇길로 산책하고 조깅하는 사람들. 집 근처에 이런 공원이 있으면 정말 좋겠다. 뭔가 아이디어가 샘 솟을 것 같은 분위기다.

그러나 아이들은 더운 날씨에 넓은 공원을 걷는 게 힘든지 계속 호텔 수영장에 가자고 조른다. 규모가 큰 공원이지만 반만 둘러보고 호텔로 돌아온다.

점심 먹고 수영장에서 아이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준 후 방에서 좀 쉰다.

늦은 오후 머라이언과 마리아나 베이등 싱가포르의 상징들을 둘러볼 수 있는 싱가포르만으로 간다. 그랩 기사 아주머니가 89일 국경일 행사 리허설 때문에 요즘 주말마다 길이 막힌다고 푸념을 늘어놓는다. 저녁 무렵 선선한 바닷바람 맞으며 둘러보려 했던 싱가포르만 산책은 힘들겠군 싶었는데 이건 뭐 한걸음 옮기기가 힘들 정도다.

모든 사람이 자리를 잡고 앉아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해서 한 친구에게 물어보니 3시간 뒤에 마리아나 베이 위에서 불꽃놀이를 한단다. 아이고 얼마나 대단한 볼거리기에 이렇게들 모여있는 건지. 우리나라 세계 불꽃놀이도 이런가? 난 사람 많은 곳은 질색이라 안 가봐서 모르겠다. 나도 일로나도 기다리는 거 싫어해 어서 이곳을 빠져나올 길을 찾지만, 사방이 통제되고 막혀있어 빠져나오기도 힘들다. 간신히 도로로 나와 그랩 택시를 부르지만 가뜩이나 일방 도로가 많은 곳에서 도로 통제까지 하니 택시도 한참을 기다려서야 겨우 탈 수 있었다. 결국, 사람 잔뜩 모여있는 싱가포르만만 찍고, 오가는 택시비만 날리고 호텔로 돌아온다.

싱가포르에서 육로 국경을 통해 말레이시아로 가는 방법으로는 택시, 버스, 기차가 있다. 우리는 말레이시아 국경도시인 조호바루로 가는 것이 아니라 말라카로 가기 때문에 말라카로 바로 가는 버스를 타려 했었다. 하지만 버스를 타면 국경을 건널 때 버스에서 내려 짐을 가지고 출입국 검사를 받아야 하는데 그 줄이 길어서 한 시간은 기본으로 기다려야 한단다. 기차는 수주전부터 예약해야 한다니 일찌감치 패스. 택시는 혼자 타면 가격이 비싸지만 우린 넷이고, 출입국 검사 시 택시 안에 앉아서 기다릴 수 있다고 하니 아이들과 함께라면 택시를 타는 편이 낫다. 단지 택시는 조호바루 버스터미널까지 운행하니 그곳에서 다시 티켓을 끊고 말라카행 버스를 타는 절차가 있지만, 출입국 심사대에서 한두 시간을 서서 기다리는 것보단 훨씬 낫다. 종합적인 가격 면에서도 비슷해서 우린 택시를 선택했다. 다행히 호텔 근처에 국경으로 향하는 택시 종점이 있어 금방 택시를 잡을 수 있었다.

국경에 다다르면서 교통 체증이 심해졌지만, 시원한 에어컨 바람나오는 택시 안에 앉아 기다리면 그만이다. 짐 검사도 없이 여권만 살펴보고 무사통과.

싱가포르에선 지출이 컸다. 제일 큰 실수는 시내 중심가에 숙소를 잡은 데 있다. 구경거리 많은 중심가라 좋은 선택이라 생각했지만, 호텔에서 아이들과 함께 걸어갈 만한 거리는 한정적이고 결국 어딜 가도 교통편을 이용해야 했는데 상대적으로 저렴한 택시비를 생각하면 중심가에서 벗어난 곳에 숙소를 잡는 편이 나았다. 왜냐하면, 그쪽이 숙박비도 저렴하고, 로컬 식당도 많기 때문이다. 호텔이 위치한 시내 중심가 식당의 음식값은 정말 어마무시했다.

우리나라는 로컬 지역의 식당과 관광지의 식당 가격 차가 많아야 2~3배 정도지만 이곳은 5배 이상이다. 그만큼 빈부격차가 크다는 얘기일 거다. 싱가포르가 겉으로는 잘 발전하고 있는 선진국처럼 보이지만 그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조금은 이상하게 느껴지는 국가 시스템을 가진 나라라는 걸 알 수 있다. 마치 전체주의 사회 같은... 싱가포르에서 대규모 소요 사태가 일어났다는 뉴스를 본 적이 없으니 이곳 사람들은 이 시스템에 잘 길들여진 것 같다. 뭐 그럼 내 상관할 바는 아니지. 어쨌든 다시 오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는다. 굿바이.

 

지난겨울 다녀온 베오그라드는 여행이라기보다 처가 방문의 의미가 컸기 때문에 이번 여행이야말로 기나긴 코로나 시국이 이후 떠난 첫 여행이라 할 수 있다.

각국에서 자가격리가 풀리기 시작하자마자 비행기표를 알아봤다. 한창 성수기인 7월 말에 항공권을 끊어본 적이 없지만, 일로나의 일 때문에 그리고 날이 추워지면 또 코로나가 확산할지 모르니 기회가 생겼을 때 떠나기로 했다. 일주일 내외의 기간에 먼 길을 떠나긴 그래서 동남아 전역을 검색한 결과 성수기를 감안하고도 잔뜩 거품이 낀 항공권 사이에서 나름 착한 가격을 발견했으니 그곳이 바로 보홀이었다. 마닐라를 경유해 가는 것이기에 당연히 마닐라가 더 저렴했지만 바다가 없는 필리핀 여행이 무슨 의미가 있나. 그리고 마침 보홀도 관심에 두고 있던 곳이라 바로 항공권을 끊었다. 비록 악명 높은 에어아시아에 자가 경유 편이긴 하지만 난 지금 시간보다 돈의 가치가 더 큰 상황이니 저렴한 게 우선이다. 어쨌든 보홀은 그런 이유로 선택되었다.

짧은 여행이기에 이번엔 특별히 친구를 꼬셨다. 아이들이 어린 탓에 어딜 가도 매번 같은 패턴의 여행이 되기에 역시 아이들이 있는 친구에게 슬쩍 운을 떼봤더니 좋다고 해서 같이 가기로 했다. 네 명의 아이와 함께 하는 여행이 과연 어떻게 진행될지...

공항에서 출국 심사를 하는데 예상대로 일로나의 여권에 문제가 있어 따로 사무실에 불려간다. 작년 6월 시험에 합격한 후 신청한 국적취득이 드디어 통과해서 며칠 전에 통보를 받았었다. 한국 국적을 취득했기에 우리나라에서 더는 세르비아의 여권을 사용하면 안 되는 상황인데 아직 한국 여권을 신청할 수 없는 상태라 세르비아 여권으로 출국을 하려고 하니 문제가 생긴 것이다. 다행히 서류 몇 장에 사인하고 금방 나왔다.

즐거운 마음으로 비행기에 오른다.

필리핀은 일본, 중국을 제외하고 가장 가까운 해외 여행지 중 하나다. 네 시간 정도면 그리 부담스러운 시간도 아니다.

늦은 시각 마닐라에 도착해 공항에서 가까운 호텔로 간다. 뭔가 먹을 게 있을까 싶어 혼자 나와 주변을 둘러보지만 저렴한 숙소 주변 어두워진 밤길의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다. 시끄러운 공사 소리와 길거리에 잔뜩 어질러진 쓰레기를 치우는 쓰레기차, 길바닥에 드러누워 있는 노숙자들, 네온사인이 반짝이는 KTV 주변에서 나를 향해 미스터! 미스터!”를 외치는 여자들. 간신히 찾은 맥도날드엔 기다리는 사람이 너무 많다. 그냥 호텔로 돌아와 잔다.

호텔 바로 앞에서 큰 공사를 하고 있어 너무 시끄럽다.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멍한 상태로 이곳에서 유명한 페스트푸드 체인인 졸리비로 간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주변에 딱히 먹을 만한 식당이 없었다.

간단히 요기하고 공항으로 간다.

국내선이 오가는 마닐라공항 터미널4는 규모에 비해 사람이 많아 분주하기 짝이 없다. 아무래도 섬이 많은 나라이다 보니 다른 나라보다 비행기 이용이 많아서 그런 게 아닐까 생각된다. 그리고 이들의 느려터진 일 처리도 그 분주함에 한몫하고 있다.

한참을 기다려 비행기 출발 40분이 남은 시점 드디어 탑승수속대 앞에 선다. 직원이 한참 조회를 한 후 우리 티켓에 문제가 있다며 맨 끝 창구에 가보라고 한다. 문제 해결 창구인듯한 끝 창구에선 우리 비행기 탑승 수속이 10분 전에 마감됐다며 발권이 안 된다고 한다. 무슨 소리냐고 40~50분을 기다렸는데 아무런 언질도 없이 수속을 종료하면 어떡하냐 따져도, 아직 40분이나 남았으니 지금 빨리 해달라 해도 깐깐하게 생긴 직원은 안된다고만 할 뿐이다. 되려 아까 마감 방송 못 들었냐며 오히려 우리를 질타한다. 사실 10분 전쯤에 확성기로 뭐라 뭐라 떠드는 소리를 듣기는 했다. 허나 필리핀의 영어 발음이 알아듣기가 힘든 데다가 사람이 득실대는 공항에서 깨끗하지 않은 확성기로 외치는 소리를 알아듣지 못해 그냥 그러려니 하고 흘려보냈었다. 어쨌든 우리가 산 1150분 비행기는 못 타고 다음 비행기인 1740분 걸 타야 하는데, 새로 항공권을 사야 하는 건 물론이고 그것도 꽉 차서 대기 11번이라고 한다. 당장 사야 하는 항공권의 가격은 우리 여정에서 가장 짧은 편도 구간임에도 이번 여행 전체 항공권 가격의 절반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빌어먹을!!

에어아시아의 악명은 이미 여행자들 사이에서 유명하지만 난 그저 저렴한 가격이면 족했고, 그를 이용해 많은 곳을 다녔었고, 그사이에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헌데 아이들과 친구 가족을 대동한 상황에서 이런 일을 당하니 에어아시아에 대한 분노가 솟구친다.

사실 에어아시아의 정책이 첫 번째 이유겠지만, 이곳 직원의 서비스 마인드에도 문제가 있다. 과거 인천공항에 늦게 도착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는 나보다 항공사 직원들이 더 가슴 졸여 하며 어떻게든 나를 태우려고 같이 뛰어다닌 적이 있다. 그때도 에어아시아였으니 이는 인천과 마닐라의 차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하기사 같은 법 아래에서도 집권세력 하나 바뀌었다고 나라가 엉망이 되는 꼴을 보고 있으니, 정책이나 법은 그 자체보다 그를 운용하는 사람에 달린 것이다.

어쨌든 지금의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당장 보홀로 가는 항공편을 알아본다. 당일치기라 가격이 죄다 비슷하게 비싸다. 간신히 자리가 있는 세부퍼시픽 항공권을 사고 터미널3로 이동, 6시간을 주구장창 기다린다.

지루한 기다림 끝에 비행기에 탑승. 드디어 보홀로 향한다.

어두워진 시각에 보홀에 도착. 호텔로 가서 짐을 내려놓는다. 배가 고파 해변을 걸으며 식당을 찾는다.

보홀에서 여행자들이 주로 모인다는 알로나 비치의 밤 풍경은 무척이나 시끄럽고 번잡하다. 그 사이에서도 아이들은 그새 오늘 하루의 고됨을 잊고 바다로 뛰어들어 즐거운 웃음소리를 낸다.

우리도 해변에 놓인 식탁에 앉아 맥주를 한잔 들이키고 여유를 좀 만끽하려고 했지만, 주변 음악이 너무 시끄러워 정신이 하나도 없다. 땀도 주르륵주르륵 흘러내리고. 적당히 배를 채우고 들어와 짜증 났던 긴 하루를 마무리한다.

아침을 먹으려고 식당에 가서 바깥 풍경을 바라본다. 어젯밤에 보이지 않았던 푸른 바다가 눈에 들어온다. 이제야 여행 온 기분이 든다.

얼른 밥을 먹고 우선 수영장에서 아이들과 좀 놀아준다. 물이 있는 곳이라면 아이들은 어디나 즐거워한다.

수영장에서 조금 논 후 바다로 간다. 물도 맑고, 때깔도 좋다. 푸르른 남국의 바다는 언제나 설렌다.

알로나 비치가 여행객이 많이 머무는 지역이고, 호핑투어가 많아서 해변에 정박해있는 방카가 많은 게 좀 거슬리긴 한다.

해변에서 좀 벗어난 메인도로 주변에 이런저런 맛집이 있다고 하는데, 특별히 눈에 띄는 곳도 없고, 메뉴도 가격도 다 비슷해서 그냥 해변 근처 식당에 간다. 날 더운데 아이들 데리고 왔다 갔다 하는 것도 일이다.

이곳이 여행객이 모이는 지역이라 그런지 밥값이 상당하다. 많이 오른 우리나라 밥값 물가와 비슷한데 나오는 음식이 부실해 한두 개 더 주문하면 과연 이곳이 필리핀인가 싶을 만큼 지출이 많다. 분명 현지인이 즐겨 찾는 식당이 있을 텐데 아이들 우르르 데리고 그런 델 찾아 나설 수도 없고...

점심 후엔 다시 수영장으로 간다. 난 바다가 더 좋지만, 아이들의 뜻을 꺾을 순 없다. 그렇게 종일 수영장에서 첨벙거린다.

신나게 물놀이를 했으니 이제 보홀 투어에 나설 차례. 보홀엔 크게 보홀 육지를 도는 투어와 주변 섬을 둘러보는 해상투어가 있다. 고래상어도 보고, 돌고래도 보고, 거북이도 보고, 스노콜링, 스쿠버다이빙 등을 하는 해상투어가 더 흥미롭지만, 아이들에게 적합하지 않아 육지투어만 하기로 했다. 육지 투어도 인당으로 계산하면 비용이 만만치 않은데, 우리가 코스를 짜고 운전사 딸린 차량만 대절해서 다니면 훨씬 저렴하다. 아이들 포함 8명이기 때문에 밴을 한 대에 이용하면 딱 맞다. 코스는 따로 짤 것도 없이 뻔하다. 보홀은 초콜릿힐과 안경원숭이를 빼면 딱히 볼 게 없어서 괜히 투어로 이곳저곳 내키지 않는 곳에 가느니 이편이 훨씬 좋다.

제 시간에 맞춰 온 밴을 타고 출발!

운전사에게 초콜릿힐과 안경원숭이 말고 다른 곳을 추천해달라고 하니 웬만한 건 초콜릿힐가는 길 도로 주변에 있다고 알려주겠다고 한다. 그리고 로복강 유람선 투어를 말하는데, 그건 안 좋은 리뷰를 봐서 싫다고 했다. 선상에서 뷔폐로 점심을 먹으며 강 주변을 둘러보는 투어인데, 점심도 부실하고 딱히 강 주변에 볼 것도 없고, 무엇보다 두어 시간 동안 배 위에서 뜨거운 날씨를 견뎌야 한다는 게 싫었다.

첫 번째 도착한 곳은 버터플라이 파크다. 아저씨가 차를 세우길래 그냥 내린다.

나비들 구경하고, 좁은 우리에 갇힌 맥아리 없는 악어 구경하고,

날다람쥐를 본다.

그리고 마지막에 뱀을 목에 두르고 찰깍.

우리 아이들은 무섭다고 해서 다음을 기약한다.

다 둘러보고 나와서 보니 사람들이 입구 옆 기념품 가게에 입장료를 내고 들어간다. 우리는 바로 나비를 보러 가는 아이들을 따라가느라고 입장료 내는 걸 모르고 들어갔다. 별말 없어서 그냥 차에 올라탄다.

또 한참을 달려 도착한 곳은 맨 메이드 포레스트. 허허벌판이었던 곳에 사람들이 직접 심은 마호가니 나무들이 자라 숲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그런 스토리가 있어 하나의 코스가 된 듯한데, 말 그대로 그냥 숲이라 딱히 볼 건 없다. 그냥 가는 길에 있으니 멈춰서 사진 한 방 찍을 뿐이다.

다시 한참을 달려 초콜릿힐에 도착한다. 그런데 비가 엄청 쏟아지고 주변 풍경이 생각과 다르다. 알고 보니 운전사가 데려온 이곳은 초콜릿힐이 아니라 초콜릿힐로 가는 버기카와 ATV를 타는 곳이다. 비가 쏟아지는 와중에도 사람들은 우비를 입고 질척해진 땅에서 물을 튀기며 ATV를 즐기고 있지만 우리는 아이들 때문에 엄두가 나지 않는다. 차에서 마냥 비가 그치길 기다린다.

30분을 기다렸는데도 빗줄기는 더 굵어지고 그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운전사는 아까부터 계속 곧 그칠 거라고만 한다. 경험 많은 이곳 사람의 예측이 맞긴 하겠지만 계속 이렇게 넋 놓고 있을 수 없어서 다음 코스인 안경원숭이부터 보고 오자고 하니 그렇게 하면 차가 긴 거리를 돌아가야 한다면서 난감해한다. 기름값 더 준다 하고 차를 돌린다.

또 한참을 달려 안경원숭이 서식지로 간다. 점심때가 되기도 했고 이곳에 우리 같은 관광객을 위한 점심 뷔페가 있어 끼니를 때운다.

관광객을 상대하는 곳이니 당연하겠지만 이곳도 가격에 비해 음식이 썩 만족스럽지 않다. 뭐 이럴 줄 알았으니 실망도 없다.

다행히 밥 먹는 동안 비가 그쳐서 안경원숭이를 구경하러 간다. 안경원숭이의 정식 명칭은 타르시르(Tarsier)인데, 내가 몽키라고 물어보니 몽키가 아니라 타르시르라고 계속 정정해준다. 이곳에선 타르시르를 원숭이의 한 종류로 여기지 않는 것 같다.

타르시르를 이곳에 모아둔 것인지 원래 활동반경이 넓지 않은 동물인지 잘 모르겠으나 서식지라 해서 숲을 돌아다니며 타르시르를 찾아보는 건 줄 알았는데 그냥 몇십 평 남짓한 열린 공간에서 이곳 직원이 가리키는 곳을 보며 구경하는 게 전부다.

현재 이곳엔 네 마리의 타르시르가 있다고 한다. 원래 번식을 많이 하는 동물이 아닌 데다가 지난겨울 이곳을 강타한 강력한 태풍 때문에 수십 마리가 죽었단다. 나무에 매달려 꼼짝하지 않고 있는 모습을 보면 애지중지하며 각별히 돌봐야만 할 것 같은 연약한 동물로만 보인다.

나중에 찾아보니 야생성이라 낮에는 꼼짝하지 않고 있지만 유일하게 육식만 하는 영장류로 생각보다 사나운 동물이라고... 타르시르 서식지라고는 하지만 고작 네 마리뿐이어서 타르시르 말고도 이런저런 잡다한 동물들을 구경할 수 있게 해놨다.

적당히 둘러보고 다시 초콜릿힐로 간다. 운전사에게 ATV타는 곳이 아니라 초콜릿힐로 바로 가자고 말해둔다. 곧 도착한 초콜릿힐은 어느새 비가 그치고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고 있다. 주변 경치를 감상할 수 있게 해놓은 봉우리에 오른다.

대게 홍보용 사진은 최적의 앵글로 가장 멋있게 보이는 구도를 잡고 찍기 때문에 실제 장소에 가보면 사진만 못한 경우가 많다. 이곳도 그러지 않을까 싶었지만, 예상과 다르게 불쑥불쑥 솟아오른 봉우리가 굉장히 많다.

사진으로 처음 초콜릿힐을 봤을 때 제주도 오름 떠올렸었는데 오름보다 규모가 작고 촘촘히 분포하고 있어서 더 볼만하다. 이것들이 모두 수백 수천만 년 전 바다였던 이곳에서 형성된 산호였다고 하니 참 신기할 따름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것도 그것을 흔하게 볼 수 있다면 감흥을 느끼기가 힘들다. 초코릿힐도 그렇고 타르시르도 그렇고 이곳이 아니면 보기 힘든 이런 볼거리가 있다는 건 보홀의 큰 장점이다.

그런데 우리 아이들은 왜 이렇게 사진 찍히길 싫어하는지...

볼만했던 초콜릿힐 구경을 마치고 다시 차에 오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바클레욘이라는 유명한 성당이 있다하여 잠시 들려 구경한다. 뭐 그냥 스페인 식민지 시절에 지어졌다는 오래된 성당이다.

호텔로 돌아와 잠시 쉰 후 식당에 가서 식사와 함께 맥주 한잔.

통풍 때문에 술자리를 잘 안 만들려 하지만 친구와 함께 있으니 매일 맥주를 마시게 된다.

이런 핑계로 마시는 거지 뭐.

여행객이 모이는 지역이라 팡라오의 식당엔 라이브 공연을 하는 곳이 많다. 내가 즐겨들었던 10~30년 전 팝 음악이 주류라 신나긴 하는데 불륨이 커서 대화엔 좀 방해가 된다.

너무 시끄러워 서둘러 식사를 마치고 삼겹살 구이를 사 들고 호텔에 돌아와 맥주를 더 마신다.

종일 돌아다니며 재미있는 구경을 하고 돌아와 마지막으로 호텔에서 맥주 한잔. 이것만큼 훌륭한 하루가 또 있을까.

보홀 팡라오 섬엔 여러 비치가 있는데 그중에서도 두말리안 비치가 가장 좋다는 글을 읽었었다. 그런데 몇몇 리조트가 전용비치로 사용하는 곳이라 현지의 분위기를 느끼기엔 적합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우선 사람들이 제일 많이 찾는다는 알로나 비치에 숙소를 잡고 그동안 보홀 구경을 좀 한 다음 두말리안 비치로 이동하는 거로 계획을 짰다. 리조트 숙박비가 만만치 않았지만, 친구 가족도 아이들도 좋아할 만한 보홀 비치 클럽이라는 숙소로 이동한다.

규모 큰 리조트라 경비의 확인을 받고 입구에 들어서고도 좀 더 차를 타고 이동해 로비에 도착한다. 이런 리조트가 처음이라 꽤나 근사해 보인다.

전용 비치에서 보이는 바다의 때깔 또한 알로나 비치와 확연히 다르다.

~ 이래서들 비싼 돈을 주고 이런 데 묵나 보다.

규모가 있는 만큼 밖으로 나가기가 힘들어 내내 리조트 내의 식당을 이용해야 하는 상황이 좀 부담스러웠는데 메뉴를 보니 알로나 비치에 깔린 흔한 식당의 가격과 별 차이가 없다. 주문한 음식은 훨씬 깔끔하고 맛도 좋다. 필리핀에서 8~9천원 주면 최소 이 정도 정갈함과 맛이 있어야 한다. 그러니 알로나 비치의 식당엔 얼마나 거품이 끼어있는지..

맛있게 식사를 한 후엔 내내 해변과 수영장을 오가며 물놀이를 한다. 보통 오전 밀물 때엔 해변에서 

오후엔 썰물 때라 수영장에서 논다.

전용 비치라 사람도 없고 야자수 조경도 예쁘게 잘 심어놨다.

바닷물 때깔은 내가 가본 곳 중 최고로 여기는 모리셔스, 팔라우, 20년 전 태국의 무꼬쑤린의 바다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훌륭하다.

길지 않은 휴가라면 보홀 직항으로 바로 이곳에 와서 3~4일 늘어지다 가기에 딱 좋은 리조트 같다.

이 리조트 아니 보홀의 안 좋은 점은 밥 먹을 때 채소가 너무 없다는 것이다. 나는 삼시 세끼 삼겹살을 즐길 수 있는 완전한 육식파지만, 그래도 채소 반찬을 조금씩은 곁들여야 한다. 그런데 보홀 식당 음식엔 채소가 없어도 너무 없다. 호텔의 조식 뷔페에도 제대로 된 샐러드 코너가 없다. 너무 기름진 음식뿐이어서 샐러드를 따로 주문해도 작은 그릇에 조금 담겨 나올 뿐이다. 사시사철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이곳에 왜 이렇게 채소가 없는지 이해할 수 없다.

보홀에서의 즐거운 시간을 뒤로하고 다시 마닐라로 향한다.

마닐라에 도착해 제일 먼저 안티젠 검사를 받기 위해 나선다. 많은 검색을 통해 마닐라에서 제일 저렴한 곳을 발견했는데 마침 호텔 근처에 있어서 슬슬 걸어간다.

아이가 면봉만 봐도 울음을 터뜨리자 대충 코 주변만 훑고 만다. 음성 결과지만을 위한 요식행위와 다를 바가 없다. 언제까지 여행할 때마다 이걸 신경써야하는 건지...

저녁에 친구와 단둘이 나와 동네를 둘러본다. 공항 근처에 잡은 호텔 주변엔 카지노와 5성급 호텔이 즐비한 화려한 곳인데,

한두 블록 안쪽으로 들어가자 로컬 분위기 물씬 풍기는 서민 동네다.

이곳 식당의 메뉴를 보니 보홀의 그것과 차이가 크다. 아무리 관광지라지만 3~5배는 너무 심했다.

우리는 로컬 느낌의 펍에서 한잔하고 싶었는데 이상하게도 술 한잔할 곳이 없다.

한 시간을 뺑뺑 돌다가 결국 편의점에서 맥주를 사 들고 와 호텔 방에서 마지막 한잔을 마신다.